아모스 3장 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관한 수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원리를 몰랐기 때문에, 성서를 보아도 그 숨은 뜻을 알 길이 없었다. 성서에서는 하나의 선지자의 생애에 대한 기록도 그것의 실상은 단순히 그의 역사에만 멎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선지자의 생애를 통하여 타락인간이 가야 할 길을 보여준 것이다. 여기에서는 특히 하나님이 야곱과 모세를 세워 복귀섭리노정을 걷게 하시어, 그것으로써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걸으실 섭리노정을 어떻게 미리 보여주셨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겠다.
이삭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에 있어서 ‘실체기대’를 세우는 중심인물이었던 야곱이 아벨의 입장을 확립하여 가지고,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사탄을 굴복시켜 나아가던 전 노정은, 야곱에 의한 그 상징노정을 형상적으로 걸어야 할 모세노정이나, 또 그것을 실체적으로 걸어야 할 예수님의 노정에 대한 본보기 노정이었다. 그리고 이 노정은 이스라엘 민족과 전인류가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사탄을 굴복시키면서 걸어가야 할 본보기노정이기도 하다.
Ⅰ. 예수님의 전형노정으로 야곱노정과 모세노정을 세우신 이유
복귀섭리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이 그의 책임분담으로서 사탄을 자연굴복시키고 주관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조상으로서 메시아의 사명을 맡고 오신 것도, 사탄굴복의 최종적인 노정을 개척하여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그 노정을 따라가게 함으로써, 사탄을 자연굴복케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도 순종굴복하지 않았던 사탄이 인간조상으로 오시는 예수님과 성도들에게 순종굴복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원리적인 책임을 지시고 야곱을 세우심으로써, 그를 통하여 사탄을 굴복시키는 상징노정을 본보기로 보여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야곱을 세우시어 사탄을 굴복시키는 본보기노정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모세는 이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그 형상노정을 걸음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야곱노정을 밟아온 모세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그 실체노정을 걸음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었으며, 한편 또 성도들도 그 노정을 따라 걸음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키고 주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세가 자기와 같은 선지자 한 사람을 하나님이 세우실 것이라고 한 것은(사도행전 3장 22절), 모세와 같은 입장에서 모세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섭리노정을 걸으셔야 할 예수님을 표시한 말이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 19절에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미 모세를 세워서 보여주신 본보기노정을 그대로 걷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다음에 오실 예수님의 모의자가 되는 것이다(사도행전 3장 22절).
Ⅱ. 야곱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은 모세노정과 예수노정
야곱노정은 바로 사탄을 굴복시켜 나아간 노정이다. 그리고 사탄을 굴복시키는 노정은 사탄이 침범했던 그 경로를 되돌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야곱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은 모세노정과 예수노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① 인간은 원래 따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이었는데, 천사장으로부터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함으로써 타락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야곱이 하란에서 처자와 제물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여 가정적으로 가나안 복귀 완성자가 되기 위하여는, 사탄과 생명을 걸고 싸우는 시련에서 승리해야 했던 것이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생명을 걸고 싸워 승리함으로써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은 것은(창세기 32장 25~28절) 바로 이러한 시련을 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천사를 사탄의 입장에 세워서 야곱을 시험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야곱을 불행하게 하시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천사에 대한 주관성을 복귀하는 시련을 넘게 함으로써, 아벨의 입장을 확립케 하여 가정복귀 완성자로 세우시기 위함이었다. 천사가 이러한 시련의 주체적인 역활을 함으로써, 천사세계도 하늘편으로 복귀되어 나아가는 것이다.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민족적 가나안 복귀 완성자가 되기 위하여는, 하나님이 그를 죽이려 하는 시련에서 생명을 걸고 이겨내야 되었다(출애굽기 4장 24절). 만일 인간이 이러한 시험을 하나님에게로부터 당하지 않고 사탄에게 당하다가 그 시험에 패하게 되면, 사탄에게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편에서 시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예수님도 인류를 지상천국을 인도함으로써 세계적 가나안복귀 완성자가 되기 위하여는, 광야 40일 시험에서 생명을 걸고 사탄과 싸워 승리하셔야만 했던 것이다(마태복음 4장 1~11절).
② 인간의 육과 영에 사탄이 침범하여 타락성이 생겼으므로, 야곱은 이것을 벗기 위한 조건을 세워야 하였다. 그러므로 야곱은 육과 영을 상징하는 떡과 팥죽을 주고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빼앗는 것으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데 있어서의 아벨의 입장을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것이다(창세기 25장 34절). 이 노정을 위하여 모세노정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육과 영을 상징하는 만나와 메추리를 내려 먹여,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선민의식을 강하게 함으로써, 모세에게 순종하게 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게 하려 하셨던 것이다(출애굽기 16장 13절).
예수님이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한복음 6장 48~53절)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도 이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타락인간들이 세례요한의 입장에 있는(본장 제3절 Ⅱ.1)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 영 육 아울러 그와 일체가 되어 ‘타락성을 벗기 위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워가지고 그를 메시아로 모시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창조본성을 복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③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의 시체까지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다. 그런데 야곱은 축복을 받아 성별된 몸이었기 때문에, 그의 시체도 사탄과 싸워 분립했다는 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그 시체에 40일간 방부제를 발랐던 것이다(창세기 50장 3절). 따라서 이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은 모세에 있어서도 그의 시체를 놓고 사탄과 싸웠으며(유다서 1장 9절), 또 예수님에 있어서도 그의 시체를 둘러싸고 문제가 일어났었던 것이다(마태복음 28장 12~13절).
④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의 성장기간에 사탄이 침범하였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그 기간을 표시하는 수를 찾아 세우는 섭리를 하시는 것이다(후편 제3장 제2절 Ⅳ). 즉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 사탄분립의 3일기간이 있었고(창세기 31장 22절), 모세가 민족을 이끌고 애급으로부터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도, 이러한 3일기간이 있었으며(출애굽기 5장 3절), 또 여호수아도 이 3일기간을 지난 후에야 비로소 요단강을 건넜었다(여호수아 3장 2절). 그리고 예수님의 영적인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도 사탄 분립의 무덤 3일기간이 있었던 것이다(누가복음 18장 33절).
사탄에게 내주었던, 노아로부터 야곱에 이르는 12대의 종적인 탕감조건들을, 야곱 1대에서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야곱에게 12자식이 있었던 것이다(창세기 35장 22절). 그렇기 때문에 모세 때에도 12지파가 있었고(출애굽기 24장 4절), 예수노정에도 12제자가 있었던 것이다(마태복음 10장 1절).
7일 창조기간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는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야곱 때에는 70가족이(창세기 46장 27절), 모세 때에는 70장로가(출애굽기 24장 1절), 예수때에는 70문도가 각각 그 노정의 중심역활을 하였었다(누가복음 10장 1절).
⑤ 지팡이는 불의를 치고 앞길을 인도하며 강한 의지하는 뜻의 표징물로서, 장차 오실 메시아를 상징하였던 것이다(본장 제2절 Ⅱ.2.ㄴ). 따라서 야곱이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짚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으로 들어갔다는 것은(창세기 32장 10절), 장차 타락인간이 메시아를 받들어 불의를 치고 또 그의 인도를 받으며 그를 의지함으로써, 죄악세계를 넘어 창조이상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세도 지팡이를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홍해를 건넜으며(출애굽기 14장 16절), 예수님도 자신을 표징하는 철장을 가지고, 이 고해의 세계를 건너 하나님의 창조이상세계에로 전 인류를 인도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것이다(요한계시록 12장 5절, 요한계시록 2장 27절).
⑥ 해와의 범죄가 죄의 뿌리를 이루었고, 그의 자식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그 열매를 맺었다. 이와같이 모자로 말미암아 사탄이 침범하여 죄의 열매를 맺었으므로, 탕감복귀의 원칙에 의하여 모자로써 사탄을 분립해야만 된다. 따라서 야곱이 축복을 받고 사탄을 분립하였던 것도, 그 모친의 적극적인 협조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창세기 27장 43절). 모세도 또한 그 모친의 협조가 없었으면, 그가 죽을 자리에서 헤어나와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자리에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출애굽기 2장 2절). 그리고 예수님 때에도 역시 그를 죽이려던 헤롯왕을 피하여 그를 데리고 애급으로 피난한 그 모친의 협조가 있었던 것이다(마태복음 2장 13절).
⑦ 복귀섭리의 뜻을 이루는 중심인물은 사탄세계에서 하늘세계에로 복귀하는 노정을 걷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므로 야곱은 사탄세계인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복귀하는 노정을 걸었고(창세기 31장 33절), 모세는 사탄세계인 애급에서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복귀하는 노정을 걸었으며(출애굽기 3장 8절), 예수님도 이 노정을 걸으시기 위하여 출생하자마자 애급으로 피난갔다 돌아오셔야 했던 것이다(마태복음 2장 13절).
⑧ 복귀섭리의 최종적인 목적은 사탄을 괴멸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야곱은 우상을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고(창세기 35장 4절), 모세는 금송아지로 된 우상을 부수어 그 가루를 물에 뿌려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시게 하였으며(출애굽기 32장 26절), 예수님은 그의 말씀과 권능으로 사탄을 굴복시킴으로써, 이 죄악세계를 진멸하셔야 했던 것이다(전편 제3장 제3절 Ⅱ.2참조).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는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에서 이미 세워진 ‘메시아를 위한 기대’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탕감복귀하여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해야 된다는 원칙은 그에게 있어서도 다름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섭리를 담당한 중심인물들이 달라졌으므로, 그 인물들 자신도 또한 그러한 책임분담을 다하지 않고는 복귀섭리의 뜻을 이어받을 수 없었으며, 또 그 섭리의 범위가 가정적인 것에서 민족적인 것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에 있어서는 다음의 기록이 보이는 바와같이, 이 기대의 조성을 위한 탕감조건의 내용이 전의 것에 비하여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1. 믿음의 기대
(1)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수로 말미암은, 그 후손의 애급고역 400년기간이 끝난 다음,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복지로 돌아가는 노정에 있어서의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은 모세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가 이 ‘믿음의 기대’를 어떻게 세웠는가 하는 것을 알기 전에, 복귀섭리로 본 모세의 위치를 상고하여 모세 이전의 섭리노정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려던 다른 인물들, 즉아담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에 비하여, 모세의 다른점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그것은 첫째로, 모세는 하나님 대신의 신으로 세워졌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기 4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선지자 아론 앞에서 신과 같이 되리라고 하셨고, 또출애굽기 7장 1절에는 그를 바로에게 있어 신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다.
둘째로, 모세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의자였었다. 위에서 논한 바와같이, 하나님은 모세를 아론과 바로 앞에 신이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육신을 쓴 신은 예수님밖에 없으므로, 하나님이 모세를 신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은 곧 모세를 출애급노정에 있어서 예수님의 모의자로 세우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는 예수님의 모의자로서 예수님이 걸으실 노정을 그대로 앞서 걸음으로써, 마치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가실 길을 곧게 해야 했던 것과같이(요한복음 1장 23절) 모세도 예수님이 가실 길을 미리 개척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모세는 이 노정을 어떻게 걸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모세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였던 야곱의 후손으로서, 복귀섭리시대의 섭리역사를 담당한 중심인물일 뿐 아니라, 다음에 예수님이 오셔서 걸으셔야 할 야곱의 본보기 노정을 형상적으로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모세는 야곱가정의 입애급(入埃及이집트에 들어감) 노정에서 요셉이 세운 터전 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요셉은 또 하나의 예수님의 모의자였다. 요셉은 야곱의 하늘편 처로 세워진 라헬이 낳은 아들로서, 야곱의 사탄편 처로 세워진 레아의 소생들의 동생이었다. 그러므로 요셉은 아벨의 입장으로서, 가인의 입장에 있었던 그의 형들이 죽이려 했던 가운데서 겨우 죽음을 모면하고, 상인에게 팔린 바 되어 먼저 애급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30세에 애급의 총리대신이 된 후에, 그가 어렸을 때 하늘에서 몽시로써 교시한 대로(창세기 37장 5~11절) 그의 형들과 그의 부모가 애급으로 찾아와 굴복한 섭리노정의 터전위에서, 이스라엘의 사탄분립을 위한 애급고역노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요셉의 이러한 노정은 장차 예수님이 사탄세계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통하여 30세에 만왕의 왕으로 군림한 후에, 전 인류는 말할 것도 없고 그이 선조까지도 굴복시켜 가지고, 그들을 사탄세계로부터 분립하여 하늘편으로 복귀시킬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처럼 요셉의 전 생애는 바로 예수님의 모의자로서의 걸음이었던 것이다.
한편 또 모세의 생장과 서거도 예수님의 그 본보기노정이었다. 모세는 출생시부터 바로왕의 손에 죽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그 모친이 그를 숨겨서 키운 후에야 바로 궁중에 들어가 원수들 가운데서 안전하게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출생하자 헤롯왕의 손에 죽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계셨었으므로, 그의 모친이 그를 데리고 애급에 들어가 숨겨 키운 후에야, 헤롯왕의 통치권내로 다시 돌아와 원수들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성장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모세가 죽은 후 그 시체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도(신명기 34장 6절), 예수님의 시체의 그러한 것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모세의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바로 그대로가 아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바와같이,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걸으실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가 예수님의 모의자였다는 사실은 신명기 18장 18절내지 19절에 하나님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예수님)를 세우실 것을 예언하시면서,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벌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도 역시 하나님이 모세를 시켜, 장차 예수님이 행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
모세는 위에서 논한 바와같이, 모세 이전의 섭리노정에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여 온 다른 중심인물들과는 다른 입장에 서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아벨이나 노아나 아브라함과 같이 ‘상징헌제’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고 ‘40일 사탄분립기대‘만을 세우면,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할 수 있었다.
그 이유를 더 들어 보면, 첫째, 모세는 아벨 노아 이삭등 3차에 걸친 ‘상징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상징헌제’에 의한 섭리를 모두 마친 기대 위에 섰었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시조가 타락하여,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게 됨으로 말미암아, 타락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말씀 대신의 조건물로 세운 것이 제물이었다. 그런데 모세 때에 이르러서는, 제물을 조건물로 세워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던 복귀기대섭리시대는 지나가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대할 수 있는 복귀섭리시대로 들어왔기 때문에, ‘믿음의 기대’를 위한 ‘상징헌제’는 필요없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 아담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연장되어감에 따라, 사탄이 침범하여 연장되었던 그 섭리적인 기간을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노아가 방주로써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하여는 ’40일 사탄분립기대’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400년기간을 탕감복귀하여 40일 사탄분립기대 위에 선 후에야,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상징헌제’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400년간 고역하게 되었던 것도, ’40일 사탄분립기대’를 탕감복귀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로 인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던 그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되어 복귀섭리시대에 있어서는 ’40일 사탄분립기대’ 위에서 제물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고 서기만 하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2. 실체기대
복귀기대섭리시대에 있어서는 ‘가정적인 실체기대’를 세우는 섭리를 하셨었다. 그러나 복귀섭리시대에 들어와서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세우는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모세는 하나님 대신이었으므로(출애굽기 4장 16절, 출애굽기 7장 1절) 예수님의 입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하여는 부모의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모세는 예수님에 앞서서 그의 길을 개척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선지자로서 자녀의 입장이기도 하여다. 따라서 그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세워야 할 중심인물로서 아벨의 입장에도 설 수 있어야 하였다.
아벨은 아담 대신 부모의 입장에서 헌제를 하였기 때문에, 그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아담이 세워야 할 ‘믿음의 기대’와 함께 ‘실체헌제’를 위한 아벨 자신의 입장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과 동일한 원리에 의하여 이때에 있어서 모세도 부모와 자녀의 두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도 역시 부모의 입장에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게 되면, 그와 동시에 자녀의 입장에서 ‘실체헌제’를 하기 위한 아벨의 위치도 확립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모세가 아벨의 위치를 확립한 후, 이스라엘민족이 가인의 입장에서 모세를 통하여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면 거기에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3. 메시아를 위한 기대
모세가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고,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민족이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탕감복귀하면, 그것이 바로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그 기대 위에서, 오시는 메시아로 말미암아 중생되어 원죄를 벗고, 하나님과 심정적인 일체를 이룸으로써 창조본성을 복귀하면 ‘완성실체’가 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사탄세계인 애급에서 이스라엘 선민을 이적과 기사로써 인도하여,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돌아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노정은, 장차 예수님이 이 죄악 세계에서 제2 이스라엘인 기독교 신도들을 이적과 기사로 인도하여, 이 죄악세계의 고해를 건너고 생명의 물이 마른 사막을 돌아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창조본연의 에덴으로 복귀케 될 그 노정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모세를 중심한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이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3차로 연장된 것과 같이, 예수님을 중심한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노정도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3차로 연장되었던 것이다.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여기에서는 모세노정과 예수노정과의 세밀한 대조설명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것은 본절과 다음 절을 대조함으로써 소상히 밝혀질 것이다.
(1) 믿음의 기대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간을 애급에서 고역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수로 초래된 민족적인 탕감기간은 끝나게 되었었다. 여기에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영도하여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인물이 되기 위하여, 민족적 탕감기간인 400년을 다시 개인적으로 탕감함으로써, 40일 사탄분립의 기대를 세워야 했던 것이다. 모세는 이 목적과 함께, 타락전 아담이 믿음의 기대를 위하여 세워야 했던 40수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후편 제3장 제2절 Ⅳ) 사탄세계의 중심인 바로궁중에 들어가 40년을 지나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남 모르게 그의 유모로 세워진 어머니로부터 선민의식에 불타는 교육을 받으면서 바로궁중생활 40년을 마친 후, 선민의 혈통에 대한 지조와 충절을 변치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불어 고난을 받기를 잠시 바로궁중에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기뻐하여, 그 가운데서부터 뛰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히브리서 11장 24~25절). 이와같이 모세는 바로궁중생활 40년으로써 ’40일 사탄분립기대’를 세워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였던 것이다.
(2) 실체기대
모세는 믿음의 기대를 세움으로써, 동시에 위에서 이미 논한 바와같이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데 있어서의 아벨의 위치도 확립하게 되었었다. 이제 가인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민족이, 그들의 부모의 입장인 동시에 자녀로서의 아벨의 입장에 있었던 모세에게, 믿음으로 순종굴복하여 그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이어받음으로써 선을 번식하게 되었더면, 그 때에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가지고,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탕감복귀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와같이 모세를 따라 애급을 출발하여 가나안 복지로 돌아가는 기간은, 바로 그들이 이 실체기대를 세우기 위한 기간이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모세가 애급인을 쳐죽이는 것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모세는 자기의 동포가 애급인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불타는 동포애를 이기지 못하여 그 애급인을 쳐 죽였던 것이나(출애굽기 2장 12절), 실상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처참한 광경을 보시고(출애굽기 3장 7절) 울분을 느끼신 그 심정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모세를 중심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모세를 따라서 사막을 횡단하는 가나안 복귀노정을 성공적으로 출발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사실을 결정짓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모세가 이와 같이 애급인을 쳐죽인 것은, 첫째로 천사장이 인간시조를 타락시켰고 또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사탄이 장자의 입장에서 인류죄악사를 이루어 나오고 있으므로, 하늘편에서 장자의 입장에 있는 사탄편을 쳐서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모세로 하여금 바로 궁중에 대한 미련을 끊고, 다시는 그 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입장에 서게 하시기 위함이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의 애국심을 보여줌으로써 그를 믿게 하시기 위함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하나님이 애급인의 장자와 그 가축의 맏것을 전부 쳐버렸던 이유도 이러한 데 있었다.
모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같은 심정으로 모세의 애국심에 감동되어, 그를 더 존경하고 더 믿고 모시며 따랐더라면, 그들은 모세를 중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홍해를 건너거나 시내광야를 도는 일이 없이 바로 블레셋으로 가는 곧은 길을 통하여 가나안복지로 들어가 ‘실체기대’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 노정은 야곱의 하란 21년노정을 탕감하는 21일 노정이 되었을 것이었다.
출애굽기 13장 17절에는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급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보아서 하나님은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블레셋 땅의 곧은 길로 통하게 하려 하셨던 것인데, 이스라엘이 모세를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이 노정은 출발조차도 해보지 못하고 말았고,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때는 제1차 때와 같이 그들이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 가나안 복귀의 도중에서 애급으로 되돌아갈까 염려하여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돌아서 가도록 인도하셨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인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벨의 입장에 있는 모세에게 순종굴복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더라면,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가 애급인을 쳐죽이는 것을 보고 도리어 그를 오해하고 나쁘게 소문내었으므로, 바로는 이 소문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2장 15절). 이에 모세는 할 수 없이 바로의 눈을 피하여 이스라엘민족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게 되었으므로 그 실체기대는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며, 따라서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복귀노정은 2차 내지 3차까지 연장되게 되었던 것이다.
(1) 믿음의 기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모세가 그의 ‘믿음의 기대’를 위하여 세웠던 바로궁중 40년기간은,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모세가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기 위하여는 사탄 침범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바로 궁중생활 40년기간을 탕감복귀하는 기간을 다시 찾아 세워,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모세가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광야로 들어가 다시 40년기간을 보내게 되었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40년기간에는 이스라엘 민족도 모세를 불신한 죄로 더욱 더 비참한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 40년으로 ’40일 사탄분립기대’를 새로이 세웠기 때문에,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애급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급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급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애굽기 3장 7~10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 40년으로써, ’40일 사탄분립기대’를 다시 만들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동시에, 다시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데 있어서의 아벨의 위치도 확립하였다.따라서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경우와 같이, 가인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벨의 입장에 잇는 모세를 절대로 믿고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므로 여기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를 만들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려 하였을 때에, 모세가 애급인을 쳐죽였던 것과 같은 목적으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때에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3대 기적과 10재앙의 권능을 주시어 애급인을 치게 하심을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모세가 사탄편을 쳐야 하는 이유는 위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첫째 사탄편이 침범한 장자의 입장을 탕감복귀하고, 둘째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급에 대한 미련을 끊게 하고, 셋째 모세는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던 것이다(출애굽기 4장 1~9절).
그리고 모세가 애급인을 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수로 인한 애급고역 400년 탕감기간을 다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30년이나 더 고역을 당함으로써(출애굽기 12장 41절), 그들의 탄식이 하나님에게 상달되어 하나님의 긍휼을 자아내게 되었었다는 사실이다(출애굽기 2장 24~25절).
3대기적은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무엇을 예시하셨던가?
첫째 기적은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보여주신대로(출애굽기 4장 3~9절) 모세의 명령에 의하여 아론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던 지팡이를 바로 앞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되었다. 이것을 본 바로도 그의 술객들을 불러 지팡이를 던지게 하자 그것들도 역시 뱀이 되었다. 그러나 아론의 지팡이가 변하여서 된 뱀이 그것의 것을 모두 삼켜버렸다(출애굽기 7장 10 ~12절).
그러면 이 기적은 무엇을 에시한 것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구주로 오셔서 사탄세계를 멸하실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하나님 대신 신으로 세워진 모세(출애굽기 7장 1절) 앞에서 기적을 나타냈던 그 지팡이는, 장차 하나님 앞에서 이렇듯 기적을 나타내실, 권능적인 면에서의 예수님을 상징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또 지팡이는 대신 의지자며 대신 보호자로서 불의를 쳐서 바른 길잡이의 사명을 하는 것이어서,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전 인류 앞에 이러한 사명을 가지고 오실 것을 보여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사명적인 면에서의 예수님을 상징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상징하는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또한 뱀의 역할도 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한복음 3장 14절)라고, 자기를 뱀으로 비유하셨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로우라고도 하셨다(마태복음 10장 16절). 이것은 원래 인간조상이 악한 뱀에게 꼬임을 당하여 타락되었으니, 이것을 탕감복귀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선한 지혜의 뱀으로 오셔서, 악한 인간들을 또여 선으로 인도해야 되기 때문에, 제자들도 선한 뱀으로 오신 예수님의 지혜를 본받아 악인들을 선도해야 된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다. 한편 또 모세의 뱀이 술객의 뱀을 삼켰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늘 뱀으로 오셔서 사탄 뱀을 삼켜 멸하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둘째 기적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모세가 첫번 손을 품었을 때 그 손이 문둥병에 걸렸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그 손을 다시 품었을 때, 그 병든 손이 깨끗이 나아버렸던 것이다(출애굽기 4장 6~7절). 이 기적은 장차 예수님이 후아담으로 오셔서, 후해와의 신성이신 성신(전편 제7장 제4절 Ⅰ)과 더불어 속죄의 역사를 하시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다.
첫번 손을 품음으로써, 고칠 수 없는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은, 처음에 천사장이 해와를 품음으로써 인간이 죽음의 입장으로 타락해버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손을 다시 품어서 문둥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것은 인류의 부성신 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인류의 모성신 되신 성신(전편 제7장 제4절 Ⅰ)을 복귀하여, 암탁이 병아리를 품듯이(마태복음 23장 37절) 전 인류를 다시 품어 중생시킴으로써, 완전복귀한다는 것을 표시하신 것이었다.
셋째 기적은 강물을 육지에 부어서 피가 되게 한 것이었다(출애굽기 4장 9절). 이것은 무기물과 같은 생명 없는 존재가 유기물(피)과 같은 생명 있는 존재로 복귀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물은 타락되어 생명을 잃은 세상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요한계시록 17장 15절) 이 기적은 장차 예수와 성신이 오셔서 생명을 잃어버린 타락인간들을 생명 있는 자녀로 복귀시킨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위와 같은 3권능을 나타내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 앞에 장차 예수님과 성신이 인류의 참부모로 오셔서, 전 인류를 자녀로서 복귀하고, 사탄에게 빼앗겼던 창조본연의 4위기대를 복귀할 수 있는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다음으로 모세가 하나님에게 자기의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요구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 형 아론(출애굽기 4장 14절)과 아론의 누이가 되는 여선지 미리암(출애굽기 15장 20절)을 주셨다. 이것은 장차 말씀의 실체이신 예수님과 성신(요한복음 1장 14절)이 오셔서, 타락으로 인하여 말씀을 잃어버린 인간을 말씀의 실체로 복귀하실 것을 형상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론과 미리암이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입장인 모세의 뜻을 받들고, 그의 대신으로 영도의 사명을 했던 것은, 장차 예수님과 성신이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대신 속죄사명을 하실 것을 형상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바로 앞으로 나아가는 도중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모세를 죽이려 하셨다. 그 때에 모세는 그의 처 십보라가 그의 아들을 할례함으로써 죽음을 모면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4장 24~26절). 모세는 할례로써 그 시험을 이겼기 때문에 그의 가족이 살아났었고, 따라서 이스라엘이 애급에서 나올 수 잇게 되었으니, 이것도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할례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면 할례는 어떠한 뜻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인간조상은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음에 따라 양부를 통하여 사망의 피를 받았었다. 그러므로 타락된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 탕감조건으로 양부를 쳐서 피를 냄으로써, 그 사망의 피를 뽑았다는 표시의 조건으로 할례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할례의 근본 의의는 첫째로 사망의 피를 뽑는 표요, 둘째로는 남자의 주관성을 다시 찾는 표이며, 세째로는 본성의 자녀의 입장을 다시 찾는 약속의 표인 것이다. 그런데 할례의 종류에는 마음할례(신명기 10장 16절), 육신할례(창세기 17장 10절), 만물할례(레위기 19장 23절) 등 세 종류가 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10재앙의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구출하셨으니(출애굽기 7장 10~12장 36절), 이것도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이적과 기사로써 하나님의 선민을 구원하실 것을 보여 주신 것이었다. 야곱이 하란에서 21년간의 고역을 할 때에, 라반이 응당 야곱에게 주어야 할 푸삯을 주지 않고 열 번이나 그를 속였었다(창세기 31장 7절). 그렇기 때문에 야곱노정을 걷는 모세노정에 있어서도,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한도에 넘는 고역을 시켰을 뿐 아니라, 열 번이나 그들을 놓아 준다고 하면서 매번 속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탕감으로 10재앙을 내려 바로를 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면 이 재앙들은 또 무엇을 예시하였는가를 알아보자.
애급 편에는 3일간의 어둠이 있었고 이스라엘에게는 3일간의 광명이 있었으니,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사탄편은 흑암이요, 하늘편은 광명으로 분기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애급의 장자와 육축의 맏것을 모조리 쳤으나 이스라엘은 양의 피로써 이것을 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탄편에 있어서의 장자는 가인의 입장이었으므로 이것을 쳐서 아벨의 입장인 차자로 하여금 장자의 입장을 복귀케 하기 위함이었다. 이 재앙도 역시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당초에 장자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섭리노정을 먼저 출발한 사탄편은 망하고, 차자의 입장인 하늘 편은 예수님의 피의 대속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는 또 애급에서 많은 재물을 취해 가지고 왔는데(출애굽기 12장 35~36절), 이것도 장차 있을 예수님의 만물복귀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재앙의 이적을 내리실 때마다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셨으니(출애굽기 10장 27절), 그이유는 첫째, 바로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어,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고(출애굽기 10장 1~2절), 둘째로는 바로로 하여금 있는 힘을 다하여서 이스라엘 민족을 붙잡다가 할 수 없이 단념하게 하심으로써, 자기의 무력함을 깨닫고 이스라엘이 애급을 떠난 후에도 그들에 대한 미련을 가지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로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하여 애급에 대한 미련을 끊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모세가 애급인을 쳐 죽이는 것으로써 그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세를 도리어 불신하였기 때문에, 이 노정은 출발도 해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노정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은 그 ‘출발을 위한 섭리’로서 보여주신 3대 기적과 10재앙을 보고, 모세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주신 진정한 이스라엘의 영도자라는 것을 믿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 위에서 아벨의 입장을 확립한 모세를 믿고 따르는 입장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드디어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일시적으로 이와같이 모세에게 순종굴복하였다고 해서 그것으로 곧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섭리노정에 사탄이 침범하여, 오랜 섭리의 기간을 사탄에게 내주었던 것이므로, 모세에 대하여 가인의 입장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기간’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이 광야노정의 전 기간을 두고 순종과 굴복으로 모세를 믿고 따라가지 않고서는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에게 순종하여 광야노정을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제2차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그 1차 때보다도 더 큰 은사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으므로, 제2차 노정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이 세워야 할 탕감조건은 더 가중되었던 것이다. 즉 제1차 노정에 있어서는 그들이 모세를 믿고 따르기만 하였더면, 블레셋의 곧은 길로 인도되어 야곱의 하란노정 기간수인 21일간이면 가나안 복지로 들어갔을 것이었다. 그런데 제2차 노정에 있어서는 출애굽기 13장 17절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같이, 만일 그들이 블레셋 땅의 곧은 길로 인도되면 전쟁을 보고 두려워함으로써, 제1차 노정 때와 같이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 애급땅으로 되돌아갈까 염려하시어, 하나님은 그들을 이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홍해를 건너고 시내광야를 돌아 21개월 걸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노정을 취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되어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21개월 광야노정을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미 위에서 논술한 바와같이, 이 노정이 어떻게 장차 오실 예수님을 중심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본보기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모세에게 굴복한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애급땅에서 희생을 드릴 것을 허락했을 때에, 모세는 그리함은 불가하나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급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급사람이 보는 데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대로 하려 하나이다(출애굽기 8장 26~27절)라는 말로써 바로을 속여 자유허여의 3일 간을 얻어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나왔다.
이 3일기간은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헌제를 위하여 사탄분립에 소요된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 후 이것은 섭리노정을 출발할때마다 사탄 분립에 필요한 탕감기간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야곱이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려 할 때에도, 라반을 속이고 하란을 떠나 사탄을 분립한 3일기간이 있었다(창세기 31장 19~22절). 이와 마찬가지로 모세에게도 그가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기 위하여서는, 바로를 속이고 자유행동을 취하여 사탄을 분립하여 3일기간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후일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사탄분립을 위한 3일기간이 있은 후에야 영적 복귀섭리의 출발을 하시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도 되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장정 60만명이 라암셋을 출발한 것은 정월 15일이었다(출애굽기 12장 6~37절, 민수기 33장 3절).
이스라엘 민족이 3일기간을 뜻맞게 세워 숙곳에 이른 후에는, 하늘이 은사를 내리시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셨다(출애굽기 13장 21절). 모세노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한 낮(양)의 구름기둥은,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으로 인도할 예수님을 표시하고, 밤(음)의 불기둥은 여성신으로서 그들을 인도할 성신을 상징했던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지팡이로 홍해를 가름으로써 이것을 육지와 같이 건넜으나 그들의 뒤를 추격해 오던 애급의 병거는 다 수장되어 버리고 말았었다(출애굽기 14장 21~28절). 이미 위에서 논한 바와같이 바로 앞에 선 모세는 하나님을 상징하였고(출애굽기 7장 1절), 모세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실 예수님을 상징하였다. 그러므로 이 기적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 사탄은 예수님을 따라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걷는 신앙자들의 뒤를 추격할 것이지만, 지팡이의 사명자로 오시는 예수님이 철장으로(요한계시록 2장 27절, 시편 2장 9절) 그들 앞에 가로놓인 이 고해의 세상을 치면, 이 고해도 평탄한 길로 갈라질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의 갈 길은 열리고 추격하는 사탄은 멸망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전편 말세론에서 이미 밝힌 바와같이, 철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7장 15절에는 이 죄악세상을 ‘물’로 비유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을 고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통념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를 건너서 애급을 떠난지 제2월 15일에 신광야에 이르렀다(출애굽기 16장 1절). 이때부터 하나님은 그들이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만나와 메추리를 내려 먹이셨으니(출애굽기 16장 35절), 이것은 장차 예수님의 살(만나)과 피(메추리)를 모든 인간에게 주실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6장 48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신광야에서 떠나 르비듬에 장막을 쳤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시어 호렙산의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그들에게 먹이셨다(출애굽기 17장 6절).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하였으니, 이 행사는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생명수 샘물로(요한복음 4장 14절) 모든 사람을 살리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가 다음에 시내산에서 받게 되는 두 석판도 예수와 성신을 상징하지만, 반석은 석판의 뿌리가 되므로 이것은 또한 하나님도 상징한다. 모세가 석판의 뿌리가 되는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먹여 살린 터전이 있기 때문에, 이 터전 위에서 모세가 석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법궤와 성막을 지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여호수아가 르비듬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패하였다. 그러므로 아론과 훌은 돌을 쌓아 모세를 그 위에 앉히고, 그의 손을 내려지지 않도록 좌우에서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앞에서 싸운 여호수아는 아말렉왕과 그 백성을 쳐서 승리하였다(출애굽기 17장 10~13절). 이것도 장차 예수께서 오실 때에 되어질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으니, 여호수아는 예수를 믿는 신앙자를, 마말렉은 사탄세계를, 그리고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고 서 있는 것은 그 앞에서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쳐서 멸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한 예수님과 성신의 3위신을 모신 신앙자들은 그 앞에 오는 모든 사탄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3) 성막을 중심한 복귀섭리
우리는 먼저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받게 된 경위를 알아야겠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말렉과 싸워서 승리한 후 제3월 초에 시내광야에 이르렀다(출애굽기 19장 1절). 여기에서 모세는 장로 70인을 거느리고 시내산으로 올라가 하나님을 뵈었다(출애굽기 24장 9~10절). 하나님은 특별히 모세를 시내산정으로 부르시사, 석판에 기록한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40주야의 금식을 하라고 명하시었다(출애굽기 24장 18절). 모세는 시내산에서 금식을 하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법궤와 성막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출애굽기 25장 31장). 그리고 40일간의 금식이 끝났을 때 모세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석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것이다(출애굽기 31장 18절).
모세가 이 석판을 가지고 시내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 앞으로 나아갔을 때, 그들은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어 가지고,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섬기고 있었다(출애굽기 32장 4절). 이것을 본 모세는 크게 노하여 손에 들었던 석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출애굽기 32장 19절).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처음것과 같은 석판을 깎아 만들어 오면 거기에 다시 십계명의 말씀을 써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애굽기 34장 1절). 이 말씀을 받은 모세가 다시 40주야를 금식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의 석판에 다시 십계명을 기록하여 주셨다(출애굽기 34장 28절). 모세가 이 석판을 가지고 다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나타났을 때 비로소 그들은 모세를 받들게 되어 법궤를 만들고 성막을 건축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35장 ~ 40장).
ㄱ. 석판 성막 법궤 등의 의의와 그 목적 차트
석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세가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을 받았다는 것은, 타락으로 인하여 제물로만 하나님을 대해 오던 복귀기대섭리시대는 지나가고, 타락인간이 말씀을 복귀하여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복귀섭리시대에로 들어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후편 서론에서 밝힌 바와같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던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었더라면, 그들은 말씀의 완성실체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됨으로 인하여 말씀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
이제 모세가 40일 사탄분립기간으로써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을 찾았다는 것은, 사탄세계로부터 잃어버렸던 아담과 해와를 상징적인 말씀의 실체로 복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은 복귀한 아담과 해와의 상징체로서 장차 말씀의 실체로 오실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했던 것이다. 성경에 예수님을 흰 돌로 상징하였고(요한계시록 2장 17절) 또 반석은 곧 그리스도(고린도전서 10장 4절)라고 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석판은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하기 때문에, 결국 이것들은 또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것이되기도 한다. 339
다음으로, 성막의 의의는 무엇이었던가?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자기의 몸으로 비유하셨다(요한복음 2장 21절). 그리고 또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셨던 것이다(고린도전서 3장 16절). 그러므로 성전은 예수님의 형상적인 표시체인 것이다.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제1차 가나안복귀에 성공하였더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곧 성전을 짓고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하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제1차 노정은 출발조차도 해 보지 못하였고, 제2차노정에서는 홍해를 건너 광야에서 떠돌아다니게 되었으므로 성전은 건축하지 못하고 그 대신 성막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막은 예수님의 상징적인 표시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하실 때에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애굽기 25장 8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성막은 지성소와 성소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씩 들어가 헌제를 하는 곳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어서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시는 곳이므로, 이것은 예수님의 영인체를 상징한 것이었고, 성소는 보통 제사 때에 들어가는 곳으로서, 이것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한 것이었다. 따라서 지성소는 무형실체세계를, 성소는 유형 실체세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이 위로부터 둘로 갈라졌다는 것은(마태복음 27장 51절),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영적 구원섭리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영인체와 육신 또는 하늘과 땅이 서로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법궤는 무엇이었던가? 법궤는 지성소에 안치하는 언약궤로서, 그 속에는 예수님과 성신, 따라서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두 석판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또 거기에는 광야노정에 있어서 잇그라엘 민족의 생명의 양식이었고, 또한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만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표상하는 금항아리에 담긴 것이 들어 있었으며, 또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던 아론의 싹난 지팡이(히브리서 9장 4절)가 거기에 들어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법궤는 크게는 천주의, 작게는 성막의 축소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법궤 위에는 속죄소가 덮였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금으로 두 그룹을 쳐서 만들어 속죄소의 좌우에 덮으면, 두 그룹 사이에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시어, 이스라엘족속에게 전할 모든 말씀을 주시겠다고 하셨다(출애굽기 25장 26~22절). 이것은 장차 두 석판으로 표시된 예수님과 성신이 오시어 역사하시게 됨으로써 속죄가 성립되면, 그 속죄소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동시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생명나무에로 나아가는 길을 막았던(창세기 3장 24절)이 좌우로 갈라져서 누구든지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주신 목적은 어디 있는가? 이스라엘민족은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수로 초래된 400년 탕감기간을 마치자 3대 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민족을 치고, 추격해 오던 애급의 수 많은 군사와 병거를 수장하고서 홍해를 건너 광야길로 나섰다. 하나님의 뜻으로 보아서도 그러하지만, 이처럼 원수를 맺고 떠난 애급이었기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입장에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가나안 복귀는 기필코 이루어져야 하는 노정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출발을 위한 섭리’를 그처럼 기사와 이적으로 하셨고, 또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여,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환경 가운데로 몰아넣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은 모두 불신으로 흘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최후에는 모세마저 불신의 행동을 취할지도 모르는 터이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비록 사람은 변하여도 변할 수 없는 그 어떠한 신앙의 대상을 세워놓으시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즉 언제나 단 한사람만이라도 이것을 절대로 믿고 받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신앙의 대상을 마치 바톤과 같이 이어받게 하면서 섭리의 뜻을 이루어 나아가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신앙의 대상을 무엇으로 세워야 할 것이었던가? 석판이 들어있는 법궤를 안치함으로써 메시아를 상징하였던 성막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민족이 성막을 지었다는 것은, 벌써 메시아가 상징적으로 강림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이 성막을 메시아와 같이 충성으로 받들어 가나안 복지로 복귀하면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그 때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모두 불신으로 돌아가더라도 모세 한 사람만이라도 남아서 그 성막을 지키면, 그 민족은 다시 탕감조건을 세워가지고 성막을 모시는 모세를 중심한 그 기대 위에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설혹 모세마저 불신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민족 중의 어느 한 사람이라도 모세를 대신하여 끝까지 성막을 지킨다면, 또 그를 중심하고 불신으로 돌아간 나머지 전민족을 복귀하는 섭리를 하실 수 있는 것이었다. 342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면 모세의 가정은 성막 대신이요, 모세는 석판과 법궤 대신이며, 또 모세의 가법은 천법 대신이 되었을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석판이나 법궤나 성막이 필요 없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성전을 지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석판과 성막과 법궤는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감에 따라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주신 것이었다. 성막은 예수님과 성신의 상징적인 표시체로서 성전을 지을 때까지 필요한 것이었고, 성전은 예수님과 성신의 형상적 표시체로서 실체성전이신 메시아가 강림하실 때까지 필요했던 것이다.
ㄴ. 성막을 위한 기대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상징적 메시아인 성막을 맞기 위하여서도 ‘성막을 위한 기대’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대를 세우기 위하여는,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와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그러면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하여서 이 두 기대를 세울 수 있었던가?
모세가 성막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금식기도로서 ’40일 사탄분립기간’을 뜻맞게 세우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는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서 성막이상을 세워 나아가는 모세에게 믿음으로써 순종굴복하면, 성막을 위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지고, 따라서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성막이라 함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성판과 법궤를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다.
a. 제1차 성막을 위한 기대
인간은 6일만에 창조된 말씀의 실체이다(요한복음 1장 3절). 따라서 이와같이 창조되었다가 타락된 인간을 복귀하시기 위한 재창조의 말슴을 주시려는 섭리를 하시기 위하여는, 사탄의 침범을 당한 창조기간의 6수를 성별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6일 동안 여호수아의 영광의 구름으로 시내산을 덮으심으로써 성별하신 후, 제7일내에 그 구름 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셨다(출애굽기 24장 16절). 모세는 이때부터 40주야를 금식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24장 18절). 그것은 이미 위에서 상세히 논한 바와같이 이스라엘민족이 홍해를 건너 후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상징적 메시아인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우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타락성을 벗기위한 탕감조건’은, 저들이 일시적으로 모세를 믿고 순종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성전을 짓고 메시아를 맞을 때까지 계속하여 그러한 입장에 서 있어야만, 그것이 성립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논한 바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막을 세우기 위하여, ‘타락성을 벗기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를 이루는 데 있어서도,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가 ’40일 사탄분립기간’을 지나서 성막을 세울 때까지, 그를 믿고 모시고 순종해야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가 금식기도를 하는 기간에, 모두 불신으로 돌아가서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섬겼던 것이다(출애굽기 32장 4절).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성막을 위하여 세워야 했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도 이룰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적과 기사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주셨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말씀의 터를 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인간 자신의 책임분담으로 그것을 찾아야 할 이 기간에 있어서만은 하나님도 그들의 행동을 간섭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상을 만들어 놓고 춤을 추는 백성들을 보자마자 모세는 크게 노하여 손에 들었던 두 석판을 산 아래로 던져서 깨뜨렸다(출애굽기 32장 19절). 그리하여 이것은 모세가 ’40일 사탄분립기간’으로 세웠던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에 사탄이 침범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두 석판은 이미 위에서 밝힌 바와같이 후아담과 후해와로서 복귀될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한다. 모세가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하는 두 석판을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깨뜨렸다는 것은, 다음에 예수님이 오실 때도 만약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예수님과 성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본래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를 중심하고 행해진 이스라엘의 이와같은 불신은, 모세가 ’40일 사탄분립기간’을 세운 후,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에게 순종케 하심으로써 ‘성막을 위한 기대’를 이루시려던 하나님의 섭리를 좌절시키고 말았다. 따라서 ‘성막을 위한 기대’를 이루시려는 섭리는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2차 또는 3차까지 연자오디어 나아갔던 것이다.
b. 제2차 성막을 위한 기대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모두 석판을 중심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불신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르비듬에서 석판의 뿌리 되는 반석의 샘물을 마신 터전 위에서 있었기 때문에(출애굽기 17장 6절), 모세가 석판을 깨뜨린 후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석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어 오면 처음 석판에 써주시었던 것과같은 말씀을 다시 써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애굽기 34장 1절). 그러나 여기에서 ’40일 사탄분립기대’를 다시 찾아 세워,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지 않고서는, 석판을 중심한 성막을 복귀할 수 없기 때문에, 모세는 다시 40주야를 금식한 후에 십계명의 말씀을 기록한 제2차 석판과 성막이상을 복귀하게 되었던 것이다(출애굽기 34장 28절). 346
한번 깨뜨린 석판을 40주야의 금식기도로써 복귀하였다는 것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도 저를 믿는 성도들이 40일 사탄분립기대로써 그를 맞을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면, 그 기대 위에 재림하셔서 구원섭리를 다시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모세가 제2차로 석판을 중심한 성막이상을 복귀하던 ’40일 사탄분립기간’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에게 순종굴복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은 모세의 지시를 따라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성막을 건축하였던 것이니, 때는 제2년 정월 초하루였던 것이다(출애굽기 40장 17절). 이리하여 이스라엘 선민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를 이룸으로써, 성막을 위한 기대를 이룩한 터전 위에서 성막을 짓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논한 바와같이, 그들이 성막을 짓는 것만으로는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실체기대’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가나안으로 들어가 성전을 짓고 메시아를 맞을 때까지, 변치않고 이 성막을 자기들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모시고 받들어야 하였던 것이다.
제2년 2월 20일, 이스라엘 민족은 구름기둥의 인도를 따라 성막을 중심하고 시내광야에서 출발하였다(민수기 10장 11~12절). 그러나 그들은 다시 불신으로 흘러 모세를 원망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는 진노하시어 불로써 진 끝을 사르기도 하셨다(민수기 11장 1절). 이스라엘 민족은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 통곡하며, 만나 외에는 생선도 외도 수박도 없다고 모세를 원망하며 애급땅을 그리워하였다(민수기 11장 4~6절).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세우고 나아가야 할 성막을 위한 기대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게 되어, 이 기대를 복귀하려는 섭리는 다시 제3차로의 연장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c. 제3차 성막을 위한 기대
이스라엘 미족이 다시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들을 중심한 제2차 성막을 위한 기대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모세의 변함없는 믿음과 충성으로 말미암아, 그 성막은 여전히 모세를 중심한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 서 있었고, 또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르비듬에서 성막의 중심인 석판의 뿌리되는 반석의 샘물을 마신(출애굽기 17장 6절) 터전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터전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40일 사탄분립기대를 세우고, 성막을 위한 기대를 탕감복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위한 조건으로서 주신 것이 40일 정탕기간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각 지파로부터 족장 한 사람씩을 모든 12명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어(민수기 13장 1절) 40일 동안을 정탐하게 하셨다(민수기 13장 25절). 그러나 정탐에서 돌아온 12명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신적인 보고를 하였다. 즉 그 땅의 거민은 강하고 성읍이 견고할 뿐 아니라(민수기 13장 28절),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키가 커서 자기들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더라(민수기 13장 32~33절)고 하면서, 이스라엘은 그 성과 그 백성을 공격할 수 없다고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원망하고 통곡하면서 새로이 한 장관을 세워 애급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떠들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 백성들은 이미 그 보호자가 떠났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밥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 반면에 자기들은 여호와가 보호자시니 두려워 말고 그들을 공격함으로써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자고 외쳤던 것이다(민수기 14장 9절).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도리어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하였다(민수기 14장 10절). 이 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시어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민수기 14장 11절)고 하시면서,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환한하여 그 40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민수기 14장 31~34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와같이 제3차 성막을 위한 기대도 복귀할 수 없게 되어, 제2차 21개월 광야노정은 제3차 40년 광야노정으로 연장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성막을 위한 기대’가 3차나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은 세울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제2차로 세우려던 실체기대를 조성하지 못하게 되어,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로 연장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