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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2)

  • 모세를 따라 출애급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표류를 마치고 가데스바니아로 돌아왔을 때 모세는 반석을 두번 침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반석을 쳐야하는 이유와 한 번 쳐야 할 반석을 두 번친 것이 죄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입성은 어떻게 성사되었는가?
  •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3.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이 실패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이 노정의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세웠던 미디안 광야 40년 기간은 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정탐 40일 기간을 믿음과 순종으로 찾아 세우지 못함으로써, ‘날’을 ‘해’로 환산하여 광야를 떠돌아 다니다가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오는 40년 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제2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여 제3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 광야 40년 기간을 오직 믿음과 충성으로 성막을 모시고 표류하다가 가데스바네아로 다시 돌아온 모세는,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울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이 노정의 민족적인 ‘실체헌제’를 위한 아벨의 입장도 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실체기대

이스라엘 민족이 정탐 40일 노정을 믿음과 순종으로 찾아 세우지 못하고 불신과 반역으로써 실패하였으므로 ‘성막을 위한 기대’는 여전히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제2차 노정을 위한 실체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성막을 충성으로 받들고 모셧던 모세의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는 여전히 남아져 있었기 때문에, 이 터전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표류의 40년기간을, 변치않는 신앙으로 성막을 받들고 있는 모세에게 순종굴복함으로써 정탐 40일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는 기대를 세우면, 그 때에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가 조성되는 동시에 성막을 위한 기대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대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믿음과 순종으로, 성막을 중심한 모세를 받들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그때에 제3차 민족적 가나안복귀노정에 있어서의 ‘실체기대’는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광야 40년 표류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제3차 노정에 있어서의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기간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는 ‘성막을 위한 기대’를 세워가지고 제2차 노정에 그들이 모세를 받들고 성막을 건축하던 입장으로 돌아감으로써, 제3차노정의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기 위한 기간이었다.

ㄱ)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

석판과 성막과 법궤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받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미 위에서 밝힌 바 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제2차 민족적 가나안복귀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 ‘출발을 위한 섭리’로서 나타내셨던 3대 기적을 불신하는 입장에 섰었기 때문에, 그들을 탕감복귀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40일 시련기간을 거치게 하신 후에, 석판과 성막과 법궤의 3대 은사를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또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복귀하려 하였을 때, 라반이 야곱을 열번이나 속였던 것을(창세기 31장 7절)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10재앙을 내리셨던 것인데, 이스라엘이 또 이것을 분신하는 입장에 섰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십계명의 말씀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심으로써 3대 은사와 십계명을 지키게 되면, 그들은 제2차노정에서 3대 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을 출발하던 입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민족이 믿음과 순종으로 모세를 따라 광야 40년의 탕감기간을 마치고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온 후, 모세와 함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시고 받을었더면, 그들은 제2차노정에서 3대 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을 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의 목적을 이루었던 입장에 다시 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석판은 법궤의 축소체요 법궤는 성막의 축소체이므로 결국 석판은 성막의 축소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법궤나 성막은 석판이나 그의 뿌리 되는 반석으로써 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에 의하여 가데스바네아를출발하는 것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믿음과 충성으로 성막을 받들고 모세를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그 때에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짐으로써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어떻게 이루려 하셨던가? 광야 40년기간을 뜻앞에 세우지 못하고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을(민수기 20장 4~5절)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회중 앞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하여가지고 그들에게 마시게 하셨다(민수기 20장 8절).

만일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한 번 쳐서 샘물을 내어 먹임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권능을 새로이 깨달아 그를 중심하고 하나가 되었더면, 그들은 모세와 함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서,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모세를 믿고 순종하여 그를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갔더면,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게 됨으로써, 제3차 노정의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물이 없다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는 백성을 보자, 격분하여 치밀어오르는 혈기를 누르지 못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수기 20장 12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모세는 이와 같이 한 번 쳐야 할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기대’도 이루지 못하게 되어, 드디어 약속받은 가나안 복지를 눈 앞에 바라보면서 끝내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다(민수기 20장 24절, 민수기 27장 12~14절).

우리는 이제 반석을 한 번 쳐야 하는 이유와, 두 번 친 것이 어떻게 되어 죄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겠다.

요한계시록 2장 17절에서는 예수님을 흰 돌로 상징하였고, 한편 또 고린도전서 10장 4절을 보면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런데 타락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생명나무로 오신 분이시므로(요한계시록 22장 14절), 반석은 곧 생명나무이기도 하다. 한편 창세기 2장 9절의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 있어서의 장차 오실 완성한 아담을 상징한 것으로서, 이 생명나무도 또한 반석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반석은 그 완성한 아담을 상징하기도 하다.

그런데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장차 반석이 될 그 아담을 쳐서 타락시켰다. 따라서 아담은 생명나무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창세기 3장 24절), 그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생명수 샘물을 영원히 그 자손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반석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모세가 지팡이로 치기 이전, 샘물을 내지 못하던 반석은 바로 타락된 아담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탄이 장차 생명수를 낼 수 있는 반석으로 성장하고 있던 아담을 한 번 쳐서 타락시킴으로써, 그를 ‘샘물을 내지 못하는 반석’으로서의 아담이 되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샘물을 태게 함으로써, ‘샘물을 낼 수 있는 반석’으로서의 아담을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한 번 쳐서 생물을 내게 된 반석은 바로 생명나무로 오셔서 타락한 인간에게 생명수 샘물을 주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니 나의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장 14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반석을 한번 치는 것은 타락된 제1아담을 완성한 제2아담 예수 님으로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허락된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가 하늘편에서 한 번 쳐서 샘물을 내게 된 반석을 또 한 번 친 행동은 장차 복귀한 반석으로 오셔서 만민에게 생명수 샘물을 먹여 주실 예수님을 칠 수 있다는 표시적인 행동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불신과 그것을 목격한 모세가 혈기로써 반석을 두 번 친 행동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반석의 실체되시는 예수님 앞에 사탄이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조건을 성립시킨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죄가 되었던 것이다.

모세가 석판을 한번 깨뜨린 것은 복귀할 수 있었으나, 반석을 두번 친 실수는 복귀할 수 없었으니 그 이유는 어디 있었던 것인가?

복귀섭리로 보아 석판과 반석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십계명이 기록된 석판은 모세의 율법의 중심이요, 따라서 구약성서의 중심이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은 이 석판이상을 믿음으로써 그 시대의 구원권내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석판은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한 외적인 표시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하신 말씀대로, 반석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동시에 석판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석판의 실체이신 예수님의 뿌리 곧 하나님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판은 외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반석은 내적인 것이다. 또 석판은 몸으로 비유한다면 반석은 마음에 해당하며, 석판은 성소라고 한다면 반석은 지성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석판을 땅이라고 한다면 반석은 하늘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석은 석판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내적인 표시체인 것이다.

이와같이 석판은 예수님에 대한 외적인 표시체였으므로,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상징하는 모세 앞에(출애굽기 4장 16절, 출애굽기 7장 1절), 예수님의 외적인 표시체로 세워졌던 아론을 상징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에(출애굽기 32장 4절), 아론이 깨어짐에 따라서 석판도 깨어지게 되었었다. 그러나 아론이 르비듬에서 반석 샘물을 마신 터전 위에서(출애굽기 17장 6절) 회개함으로써 소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론을 상징하는 석판도 반석 샘물의 내적인 터전 위에서 다시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판의 뿌리가 되는 반석은 그리스도와 그의 뿌리되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친 행동은 만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모세가 반석 반석 2타는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던가?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던 것은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혈기를 참지 못한 결과였기 때문에(시편 106편 32~33절), 이 행동은 결국 사탄의 입장에서 행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반석으로 이루시려던 ‘출발을 위한 섭리’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외적인 행동은 사탄의 행동으로 돌아갔으나, 내적인 실제에 있어서는 그 반석에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을 먹여 살렸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급에서 나온 외적인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이 예정하신 가나안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모세도 120세를 1기로 소망의 땅을 눈 앞에 바라보면서 죽고 말았다(신명기 34장 4~5절). 그러나 여호수아가 모세의 대신으로(민수기 27장 18~20절), 반석 샘물을 마시고 성막을 받드는 광야노정 가운데서 출생한 내적인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민수기 32장 11~12절).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행동이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 반석에서는 샘물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려면 어떻게 되어 거기에서 샘물이 나올 수 있었던가?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모세는 일찌기 르비듬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시게 함으로써 반석 샘물의 터전을 마련한 바 있었던 것이다(출애굽기 17장 6절). 그리고 이 터전 위에서 세워진 석판과 성막과 법궤는, 다른 모든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40일 금식기도로써 세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서 그것을 굳게 지켜온 모세는 한 사람의 믿음에 의하여,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까지 이어져 왔었다. 그 뒤에 모세마저 불신의 입장으로 돌아갔지만 하늘을 대한 그의 심정은 변하지 않았고 또 여호수아가 그의 정탐 40일로써 세운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 변치 않는 신앙으로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르비듬에서 세웠던 반석 샘물의 터전도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그대로 남아졌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의 외적인 불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제2차 반석이 외적으로는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으나, 그의 내적인 불변의 심정과 여호수아의 믿음과 충성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내적으로는 샘물을 내어 마시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은 결과적으로 사탄의 입장에서 친 것이 되어 그 돌은 사탄이 소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돌의 실체로 오셨던 얘수님은, 그의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자, 일찍이 저들이 광야에서 잃어버렸던 이 돌을 몸소 찾으시려고 광야로 가셨었기 때문에, 사탄으로부터 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시험을 제일 먼저 받으셨던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외적으로는 혈기를 내어 반석을 두 번 쳤기 때문에,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광야에서 죽었으나, 내적으로는 그의 불변의 심정으로 인하여 반석의 샘물을 내어 먹였기 때문에, 영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장차 반석의 실체 되시는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게 되면, 예수님도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받아 십자가에 달리시게 됨으로써, 영 육 아우른 세계적 가나안 복귀는 완수하지 못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영적으로만 그것을 완수 하게 되시리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후, 하나님은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에게 불뱀을 보내어 그들을 물어 죽이게 하셨다(민수기 21장 6절). 그러나 이스라엘이 회개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여,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만은 구원을 받도록 하셨다(민수기 21장 9절). 이 불뱀은 해와를 타락시킨 옛 뱀 곧 사탄을 상징하였고(요한계시록 12장 9절), 장대 끝에 매단 구리뱀은 장차 하늘 뱀으로 오실 예수님을 상징했던 것이다(요한복음 3장 14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갔을 때는 그들을 사탄 뱀에게 내주셨다가, 그들이 회개하고 신앙을 돌이킬 때에는 다시 구리뱀으로 살려 주셨던 것과같이, 후일 예수님 때에 있어서도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그들을 사탄에게 내주시지 않을 수 없게 되리라는 것과 그 때에 예수님은 인류를 살리시기 위하여 부득이 하늘 뱀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과, 또 불신을 회개하고 그의 십자가로 인한 구속을 믿는 자들은, 누구나 구원해 주시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한복음 3장 14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사실은 실상 예수님을 중심한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십자가로 인한 영적인 노정으로 출발하게 한 먼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하여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을 때,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민수기 20장 12절). 이에 모세는 하나님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여 달라고 간곡한 애원의 기도를 올렸으나(신명기 3장 25절), 종내 그 목적의 땅을 눈 앞에 바라보면서 죽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그가 죽은 뒤에 그 시체를 장사하였으나, 그가 묻힌 곳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신명기 34장 6절).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그는 십자가에 달리시게 될 것이고, 또 할수만 있으면 죽음의 잔을 면하고 세계 가나안 복귀를 이루게하여 달라고 애원의 기도를 하실 것이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될 것과, 한편 그의 시체도 장사한 뒤에 간 곳을 아는 사람이 없게 될 것 등을 예시하신 것이다.

ㄴ) 여호수아를 중심한 실체기대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이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로써 가나안으로 복귀하려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민수기 20장 1~13절)사탄이 외적으로는 침범했지만, 르비듬 반석 샘물의 터전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는 그대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에게 먹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위에서도 밝혀 온 바와같이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서빌에 대한 또 하나의 노정을 보여주셨다. 즉 이스라엘 민족 중, 사탄 세계인 애급에서 출생하여 광야노정에서 불신으로 돌아갔던 외적인 이스라엘에 속하는 사람들은, 정탐 40일을 믿음으로 세웠던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쓰러지고, 반석샘물을 마시고 성막을 받드는 광야생활 가운데서 출생한 내적 이스라엘만이, 모세 대신의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다(민수기 32장 11~12절).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가나안땅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시면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잔손의 온 회중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민수기 27장 18~20절)고 하셨다.

여호수아는 정탐 40일기간에 불신으로 돌아갔던 온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모세가 세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위에 굳게 서서 변함 없는 믿음과 충절로써 ‘성막을 위한 기대’를 조성하고 끝까지 그것을 받들었던 오직 두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와같이 비록 모세는 불신으로 돌아갔으나, 석판과 성막과 법궤는 여전히 여호수아가 세운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그러므로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모세의 대신으로 세우시고, 그 내적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에게 복종하여 그와 함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서게 하심으로써, 반석 샘물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시고, 이 섭리에 의하여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써 거기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가지고, 제3차 노정의 여호수아를 중심한 실체기대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여호수아)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가나안으로) 건너가서 네(모세)가 볼 땅을 그들로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신명기 3장 28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후수아에게도 모세와 함께 있떤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여호수아 1장 5~6절)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생활 40년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찾아 세웠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시어 이스라엘 민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고 명령하셨던 것과 같이(출애굽기 3장 8~10절), 하나님은 광야에서 표루하는 40년을 오직 믿음과 충성으로 찾아 세운 여후수아를 모세 대신으로 부르시어,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여호수아 1장 2절)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이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가 백성의 유사들을 불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러한 뜻을 전하였을 때(여호수아 1장 10절),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당신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무릇 당신의 시키시는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자 그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여호수아 1장 16~18절)라고 대답하면서, 그들은 죽기를 맹세하고 여호수아를 따라갈 것을 결의하였다. 이와같이 모세의 사명을 대신하고 나선 여호수아는 초림때의 사명을 계승 완성하러 재림하실 예수님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모세노정을 탕감복귀하는 여호수아의 노정은, 예수님의 영적 복귀의 노정을 영 육 아울러 탕감복귀해야 할 그의 재림노정에 대한 표시적인 노정이 되는 것이다.

모세가 제2차 노정에서 가나안 땅에 정탐으로 보냈던 열 두 사람이 있었다(민수기 13장 1~2절). 그들 중 오직 충성으로 그 사명을 완수한 두 사람의 심정의 터전 위에서, 여호수아는 다시 두 사람의정탐을 여리고성으로 보냈다(여호수아 2장 1절). 그리하여 여리고 성의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두 정탐인은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던이다(여호수아 2장 24절)라고 믿음으로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광야에서 출생한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모두 그 정탐인의 말을 믿었으므로, 이것으로써 과거에 40일 정탐을 뜻맞게 세우지 못한 선조들의 죄를 탕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내적 이스라엘이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선 여호수아에게 순종할 것을 죽음으로써 맹세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여호수아와 함께 그 기대 위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그들은 반석 샘물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로써, 제2차 노정에서 3대 기적과 10재앙으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었던, 모세를 중심한 그들의 선조들과 같은 입장을 복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거너기 전에 3일노정을 찾아 세웠던 것과같이,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도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3일 조정을 찾아 세웠던 것이다(여호수아 3장 2절). 361

한편 제2차 노정에 있어서 3일노정을 지난 이스라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홍해까지 인도하였던 것과같이,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에 있어서도 그들이 3일노정을 마친 후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표상된 예수님과 성신의 상징적 실체인 법궤가 그들을 요단강까지 인도하였던 것이다(여호수아 3장 3절, 여호수아 3장 8절).

그리고 모세를 인도하던 지팡이에 의해서 홍해가 갈라졌듯이, 여호수아를 인도하던 법궤가 요단강의 물 위에 서자 언덕에 넘치던 요단의 흐름이 갈라져서(여호수아 3장 16절), 따라온 이스라엘은 육지와 같이 강을 건너게 되었다(여호수아 3장 17절). 지팡이는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한 하나의 표시체였고, 두 석판과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는 법궤는 예수님과 성신의 상징적인 실체였었다. 그러므로 법궤 앞에서 요단강의 물이 갈라지고이스라엘이 평탄하게 가나안 땅으로 복귀하였다는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과 성신 앞에 몰로 표시된 이 죄악세상(요한계시록 17장 15절)이 선 악으로 분립되어 심판을 받은 후, 모든 성도들이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완성하게 될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때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백성의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 두 사람을 택하고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곳에서 돌 열 둘을 취하고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 밤 너희의 유숙할 그곳에 두라(여호수아 4장 2~3절)고 하셨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정월 10일에 요단강에서 올라와서, 여리고의 동편 지경인 길갈에 진을 치고 요단강에서 가져온 열 두 돌을 거기에 세웠었다(여호수아 4장 20절).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예시한 것인가? 이미 논한 바와 같이 돌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상징한다. 따라서 12지파를 대표한 열두 사람이 법궤로 인하여 물이 갈라진 요단강 가운데서 열 두 돌을 받들었다고 하는 것은, 장차 12지파의 대표형으로 부름을 받을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이 죄악세상이 선악으로 갈라질 때, 그 곳에서 예수님을 받들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들이 열 두 돌을 받들었다가 가나안땅의 안정된 진에 한데 모아 놓았을 때, 여호수아는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여호수아 4장 24절)고 말하였다. 이것은 장차 돌로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는 열두 제자가, 한마음 한뜻으로 한 곳에서 하나로 뭉쳐야만,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를 완성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영원히 찬양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다.

야곱이 가는 곳마다 돌단을 쌓았던 것과 같이, 야곱의 열 두 아들의 후손인 열두 지파의 대표들도 열 두 돌을 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의 제단을 쌓아 앞으로 성전을 건축할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니,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힘을 합하여 예수님을 성전으로 받들어 모셔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후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되지 못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 2장 19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과연 12제자는 하나 되지 못하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으므로, 성전된 예수님이 십자가로써 헐렸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시어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모은 후에야 그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들어 영적인 성전으로 모시게 되었고, 또 재림하신 후에야 실체성전으로 모실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하여 제2차노정을 출발할 때, 그 해 정월 14일 유월절을 지나고 진군하였던 것과 같이(출애굽기 12장 17~18절), 길갈에 진을 쳤던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도 그 해 정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키고 굳게 닫힌 여리고의 성벽을 향해 진군을 하였다. 땅의 소산을 먹기 시작하자 40년간이나 내려주시던 만나도 그쳤으므로 그때부터는 인간의 땀으로 된 곡식으로 생활해야만 되었으며, 사탄 도성의 최후의 관문을 뚫는데 있어서도 인간으로서 할 책임을 다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4만의 병사가 선두에 서고, 그 뒤를 따라 일곱 제사장이 일곱 나팔을 불면서 행진하고, 또 그 뒤에는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이 멘 법궤(여호수아 3장 3절)가 따랐으며, 최후선에는 이스라엘 전군이 연달아 진군하였던 것이다(여호수아 6장 8~9절).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이스라엘은 이러한 행군으로 하루에 한 번씩 6일이나 성을 돌았어도 그 성엔 아무런 변동도 없었다. 그들은 인내와 복종으로 사탄의 침범을 당한 6일의 창조기간을 탕감복귀해야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순종으로 6일을 찾아 세운 후, 제7일에 일곱 나팔을 부는 7명의 제사장이 성벽을 일곱 번 돌면서 7회의 나팔소리를 끝내고 여호수아가 백성을 향하여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고 호령하자, 백성들이 이에 응하여 일제히 큰 소리로 외치니 그 성이 곧 무너졌었다(여호수아 6장).

이러한 노정은 장차 예수님의 권능과 그의 성도들에 의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 가로막혀 잇는 사탄의 장벽이 무너질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성벽은 다시 쌓아서는 아니 될 것이었으므로, 여호수아는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 계자를 잃으리라(여호수아 6장 26절)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파죽지세로 적을 공격하게 된 여호수아는 벧호론 싸움에서의 19왕과 메롬격전에서의 12왕을 합하여 모두 31왕을 멸하였으니(여호수아 12장 9~24절), 이것도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이방의 왕들을 전부 굴복시키시고 그 백성들을 포섭하여 통일된 지상천국을 건설하실 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다.

(3) 메시아를 위한 기대

이스라엘 민족은 정탐 40일의 사탄분립 기간을 세우지 못하여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실패하고, 이 기간을 재탕감하기 위하여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여 광야에서 40년을 유리하고 다시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왔다.

이때의 모세는 제3차 노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였고, 이스라엘 민족은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불신과 그에 따르는 모세의 반석 2타로 말미암아 이 두 기대는 모두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를 중심하고 애급에서 떠난 외적 이스라엘은 모두 광야에서 섬멸되었으나,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은 모세가 세웠던 제2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와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서, 정탐 40일의 사탄분립기간을 믿음과 충성으로 찾아 세웠기 때문에 ‘성막을 위한 기대’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를 중심한 외적 이스라엘은 모두 광야에서 쓰러지고 말았으나, 성막을 받드는 광야생활 가운데서 출생한 내적 이스라엘은, 모세를 대신한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충성을 다하여 법궤를 모시고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을 무찌르고 소망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되어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체기대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서 이 노정의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조성됨으로써, 아브라함 때에 이루어졌던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는 그의 제물 실수로 인하여 400년 애급고영의 탕감노정을 지나서야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러나 이미 후편 제1장 제3절 Ⅲ에서 자세히 논한 바와 같이, 그 때는 이미 타락인간들이 사탄을 중심하고 애급왕국 등의 굳건한 왕국을 건설하여, 하늘편의 복귀섭리에 대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는 세워졌을 지라도 그 터전 위에 사탄에 대결할 수 잇는 하늘편의 왕국이 건설되기까지는 메시아가 강림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으로 들어간 내적 이스라엘도 또다시 불신으로 흘러, 이 섭리는 다시 연장을 거듭하여 예수님 때까지 밀려 나왔던 것이다.

Ⅲ. 모세 노정이 보여준 교훈

모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역사노정에 있어서, 하늘뜻을 받드는 수많은 성도들이 모세에 관한 성서의 기록을 읽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모세의 역사에 관한 기록인줄만 알았고,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복귀섭리에 관한 어떠한 비밀을 가르쳐주시려 하셨다는 사실을 안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정도로 말씀 하셨을 뿐 모세노정의 근본 의의를 밝히지 않고 돌아가셨던 것이다(요한복음 16장 12절).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가 어떻게 복귀섭리를 위한 공식적인, 또는 전형적인 노정을 걸었는가 하는 것을 밝혔다. 이것이 장차 예수님께서 걸으실 길을 그대로 예시하신 것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본장 제3절을 대조함으로써 더욱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를 중심한 섭리 하나만을 보아도,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의 절대적인 목적을 지향하여 인류역사를 이끌어 나오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음으로 모세 노정은 인간의 책임분담 수행 여부에 따라서, 그 인간을 중심한 하나님의 예정의 성사 여부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예정도 그 예정을 위하여 세워진 인물 자신이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면, 그 인물을 중심하고는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것을 예정하시고, 그에게 이것을 명령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애급에서 출발한 이스라엘 민족 중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뿐, 나머지는 모두 광야에서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책임분담에 대해서는 간섭치 않으시고 그 결과만을 보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이 그렇게도 놀라운 이적과 기사로써 이스라엘을 이끌어 주셨으나, 모세가 석판을 받는 동안 백성들이 금송아지의 우상을 만드는 행동에 대해서나,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치는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 간섭도 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 결과만을 보시고 주관하셨으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자신이 독자적으로 걸어야 할 책이분담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의 절대성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이 뜻을 예정하시고 이루시려는 것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모세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의 대신으로 여호수아를 세워서라도 한 번 예정하신 뜻은 기필코 이루시고야 마셨던 것이다. 이와같이 하늘이 세우신 아벨적인 인물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가인의 입장에서 충성을 다한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아벨의 사명을 계승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태복음 11장 12절)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

한편 큰 사명을 진 사람일수록 그에게 주어지는 시험도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인간시조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배반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인물은 하나님이 돌보지 않으시고 버리시는 시험을 이기고 나서야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이 그를 죽이려 하셨던 시험을 이기고 난 후에야(출애굽기 4장 24절), 이스라엘 민족의 인도자로 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사탄이 타락을 조건으로 하여 인간을 대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무조건하고 인간에게 은사를 내리실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이 참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사를 내시려 할 때에는, 그 은사를 전후하여 사탄의 참소를 막기 위한 시험을 반드시 하시는 것이다.

모세노정에서 그 예를 들어보면, 모세에게는 바로궁중 40년의시련을 거친 후에야 제1차 출애급의 은사가 허락되었던 것이고, 또 미디안광야 40년의 시련이 있은 후에야 하나님은 제2차 출애급의 은사를 내리셨던 것이다(출애굽기 4장 2~9절).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는 시험이 있은 후에야(출애굽기 4장 25절) 3대 기적과 10재앙의 이적을 내려 주셨고(출애굽기 7장 10절~12장 36절) 삼일노정의 시련이 있은 후에야(출애굽기 10장 22절)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은사가 있었다(출애굽기 13장 21절). 한편 홍해의 시련을 지난 후에야(출애굽기 14장 21~22절) 만나와 메추리의 은사(출애굽기 16장 13절)가 있었고, 아말렉과의 싸움으로 인한 시련(출애굽기 17장 10절)이 있은 후에야 석판과 성막과 법궤의 은사(출애굽기 31장 18절)가 있었다. 그리고 40년간 광야에서 표류한 시련(민수기 14장 33절)이 있은 후에 반석 샘물의 은사(민수기 20장 8절)가 있었고, 불뱀의 시련을 거친 후에야(민수기 21장 6절) 구리뱀의 은사(민수기 21장 9절)가 있었던 것이다.

모세노정은 위와 같이 여러 가지의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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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January 15,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