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사랑의 힘과 원리의 힘으로 본 타락
인간은 원리로써 창조되어 원리궤도에 의하여 생존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원리의 힘 그 자체가 인간을 원리궤도에서 탈선케 하여 타락시킬 수는 없다. 이것은 마치 레일이나 기관에 고장이 없는 한, 기차가 스스로 궤도를 탈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기차도 그가 달리는 힘보다도 더욱 강한 다른 힘이 그와 방향을 달리하여 부딪쳐 올 때는 탈선될 수밖에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그 자신을 성장케 하는 원리의 힘보다도 더욱 강한 그 어떠한 힘이 그와 목적을 달리하여 부딪쳐 올 때는 타락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원리의 힘보다도 더욱 강한 힘이 곧 사랑의 힘이다. 그러므로 미완성기에 있어서의 인간은 그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으로 인하여 타락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원리의 힘보다도 사랑의 힘이 더 강하여서, 미완성기에 있어서의 인간이 목적을 달리한 그러한 사랑의 힘에 부딪칠 때, 그로 인하여서 타락될 수도 있게 되었던가?
창조원리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3대상 사랑에 의하여 3대상목적을 완성한 4위기대의 주체적인 사랑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인간 창조의 목적인 4위기대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므로, 사랑은 인간의 행복과 생명의 근원이 된다.
하나님은 원리로써 창조된 인간을 사랑으로 주관하셔야 하므로, 그 사랑이 사랑답기 위하여는, 사랑의 힘은 원리의 힘보다도 더 강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사랑의 힘이 원리의 힘보다 약하다면, 하나님은 원리로써 창조된 인간을 사랑으로 주관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보다도 원리를 더 추구하게 될 것이다. 예수 님이 제자들을 진리로써 세워 가지고, 사랑으로써 구원하고자 하셨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따먹지 말라는 믿음을 위한 계명을 주신 목적은 어디에 있었을 것인가? 그것은 사랑의 힘이 원리의 힘보다 강하므로, 아직 미완성기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랑의 주관을 받을 수 없는 아담과 해와가, 만일 천사장의 상대적인 입장에 서게 되면, 목적을 달리하는 그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에 의하여 타락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사장의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천사를 상대하지 않고 하나님과만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였더라면, 그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은 작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타락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계명을 지키지 않고 천사장과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그와 수수작용을 하였기 때문에, 그 불륜한 사랑의 힘은 그들을 탈선케 하였던 것이다.
미완성기에 있었던 인간에게 이러한 계명을 주셨던 것은, 단순히 그들로 하여금 타락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밖에 또 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으로서, 그 말씀을 믿고 스스로 완성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게 하여 만물에 대한 주관성을 가지게 하시기 위함이기도 하였다(전편 제1장 제5절 Ⅱ.2).
그리고 이 계명을 천사장에게 주시지 않고 인간에게 주셨던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입장에서 천사까지도 주관해야 할 인간의 창조 원리적인 자격과 위신을 세워 주시기 위함이었다.
Ⅲ. 믿음을 위한 계명이 필요한 기간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조상에게 “따먹지 말라”고 하셨던 믿음을 위한 계명은 언제까지라도 필요한 것이었던가? 사랑을 중심하고 볼 때 하나님의 제2축복 완성은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 삼고 부부를 이루어, 그 자녀가 번성함으로써(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직접적인 주관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완성되면 따먹는 것은 원리적인 것으로서 허용되도록 창조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힘은 원리의 힘보다 강하기 때문에,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부부를 이룸으로써, 그 절대적인 사랑의 힘에 의하여 하나님의 직접적인 주관을 받게 되면, 이 절대적인 부부의 사랑의 힘을 끊을 자나 그것을 끊을 힘은 없으므로 그들은 절대로 타락될 수 없다. 더구나 인간보다도 저급한 천사장의 사랑의 힘으로써는 도저히 하나님을 중심한 그들 부부간의 사랑을 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따먹지 말라하신 하나님의 계명은 아담과 해와가 미완성기에 있을 때에 한해서만 필요했던 것이다.
아담과 해와가 영 육 아울러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천사를 비롯한 피조세계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이 중요한 문제를 다루어 보기로 하자.
Ⅰ. 사탄과 타락인간
타락한 천사장 누시엘을 사탄이라고 한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논술한 바 있다. 누시엘과 인간조상이 혈연관계를 맺어 일체를 이루었기 때문에, 사탄을 중심한 4위기대가 이루어지면서 인간은 사탄의 자녀가 되고 말았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8장 44절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셨고, 또 마태복음 12장 34절과 동 23장 33절에서는 그들을 뱀 또는 독사(사탄)의 자식이라고 하셨다(마태복음 3장 7절).한편 또 로마서 8장 23절에는 처음 익은 열매된 우리들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되기를 고대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인간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혈통을 이어받지 못하고,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어서 하나님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이루었더면, 그 때 하나님 주권의 세계가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미완성기에 타락되어 사탄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 세계는 사탄주권의 세계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2장 31절에는 사탄을 세상의 임금이라고 하였고, 또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는 사탄을 세상의 신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어 사탄은 피조세계의 주관주로 창조된 인간을 주관하게 되었으므로, 그는 피조세계까지도 주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19절에는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만물이 완성된 인간의 주관을 받지 못하고 사탄의 주관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사탄을 물리치고 자기들을 주관해 줄 수 있는 창조본연의 인간들이 나타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사탄은 욥을 하나님 앞에 참소하듯이(욥기 1장 9절), 항상 모든 인간을 하나님 앞에 참소하여 지옥으로 끌어가려 하고 있다. 그러나 사탄도 그의 대상을 취하여서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지 않고는 사탄적인 활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탄의 대상은 영계에 있는 악영인들이다. 그리고 이 악영인들의 대상은 지상에 있는 악인들의 영인체이며, 지상에 있는 악인들의 영인체의 활동대상은 바로 그들의 육신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22장 3절에는 사탄이 가룟유다에게 들어갔다고 하였고, 또 마태복음 16장 23절을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를 가리켜 사탄이라고 하셨다. 한편 이러한 악영인체를 마귀의 사자라고 한 기록도 있는 것이다(마태복음 25장 41절).
지상천국을 복귀한다는 것은(전편 제3장 제2절) 전 인류가 사탄과의 상대기준을 완전히 끊고, 하늘과의 상대기준을 복귀하여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사탄이 전혀 활동할 수 없게 된 세계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말세에 이르러서 사탄을 무저갱에 가둔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사탄의 상대자가 없어지므로 사탄이 활동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이 사탄과의 상대기준을 끊고, 더욱 나아가서 고린도전서 6장 3절의 말씀대로 그들을 심판하기 위하여서는, 사탄이 사탄된 죄상과 그 정체를 알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사탄을 참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천사와 인간을 창조하심에 있어서, 그들에게 자유를 부여하셨기 때문에, 이를 복귀하시는 데 있어서도 강제로 하실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자유의지에 의한 책임분담으로써 말씀을 찾아 세워 가지고, 사탄을 자연굴복시켜야만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원칙에 의하여 섭리하시기 때문에 복귀섭리역사는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연장을 거듭해 내려오게 된 것이다.
Ⅲ. 목적성으로 본 선과 악
선과 악에 대한 정의는 이미 ‘창조원리’ 중 ‘창조본연의 가치’에서 논한 바 있다. 이제 우리는 그 목적성으로 본 선악의 내용을 알아보기로 하자. 아담과 해와가 그들에게 부여된 사랑으로써 하나님을 중심하고 4위기대를 조성하였더면, 그들은 선의세계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와 목적을 반대로 한 사랑으로서 사탄을 중심하고 4위기대를 조성하였기 때문에, 악의 세계를 이루고 말았다. 그러므로 선과 악은 동일한 내용의 것이, 상반된 목적을 지향하여 나타난 결과를 두고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악이라고 생각해 온 인간의 성품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목적 삼고 나타나면 선이 되는 예를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이제 그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흔히 죄라고 생각하는 욕망은,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창조본성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목적은 기쁨에 있고, 기쁨은 욕망을 채울 때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인간에게 욕망이 없다면, 동시에 기쁨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욕망이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망도, 살고자 하는 욕망도, 선을 행하고자 하는 욕망도, 발전하고자 하는 욕망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목적도 복귀섭리도 이루어질 수 없으며, 인간사회의 유지와 그 발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본래의 욕망은 창조본성이기 때문에, 이 성품이 하나님의 뜻을 목적 삼고 그 결과를 맺으면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사탄의 뜻을 목적 삼고 그 결과를 맺으면 악을 자아내게 되는 것이다. 이 악한 세상도 예수님을 중심하고 그 목적의 방향만을 돌려놓으면, 이 악한 세상도 예수 님을 중심하고 그 목적의 방향만을 돌려놓으면, 선한 것으로 복귀되어 지상천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은(전편 제3장 제2절 Ⅱ), 이러한 원리로 보아 자명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복귀섭리는 사탄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이 타락세계를,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룬 지상천국에로 그 방향성을 바꾸어 나아가는 섭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복귀섭리의 성격이 그렇기 때문에, 이 섭리의 과정에 있어서 다루어지는 선의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다. 왜냐 하면 어떤 특정한 시대를 놓고 볼 때, 그 시대의 주권자의 이념이 지향하는 목적에 순응하면 선이 되고, 그 목적에 반대하면 악이 되지만, 한번 그 시대와 주권자가 바뀌어 그 이념이 달라지게 되면, 동시에 그의 목적도 달라지고, 따라서 선과 악의 기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종교나 사상에 있어서도, 그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그 교리와 그 사상이 지향하는 목적에 순응하는 것이 선이고 그에 반대하는 것이 악이 된다. 그러나 일단 그 교리나 사상이 달라지거나 혹은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또는 다른 사상으로 전향하게 되면 그에 따라서 목적도 달라지기 때문에, 선악의 기준도 자연히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사회에 항시 투쟁과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주요한 원인은, 이와 같이 인간이 지향하는 목적이 달라짐에 따라서 선악의 기준이 항시 달라지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복귀과정에 있어서의 선은 이와 같이 상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상에서 사탄의 주권을 물리치고,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영존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이 주권자가 되시어 그로부터 오는 이념이 세워질 때는, 그 이념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지향하는 목적도 절대적인 것이어서 선의 기준도 절대적인 것으로 세워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재림주님에 의하여 세워질 천주적인 이념인 것이다.
사실상 인류역사는 수많은 투쟁과 혁명을 거듭하면서, 본심이 지향하는 이 절대선을 찾아 나왔던 것이다. 따라서 타락된 인간사회에 있어서의 투쟁과 혁명은, 이 절대적인 목적을 추구하여 절대적인 선의 세계를 이룩할 때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편에 있는 선영인들과 천사들을 총칭하는 말이고, 악신이라고 하는 것은 사탄과 사탄 편에 있는 악영인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선과 악이 그러하듯이 선신의 역사와 악신의 역사도 동일한 모양으로 출발하여 그 목적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선신의 역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개체의 평화감과 정의감을 증진시키며 그 육신의 건강도 좋아지게 한다. 그러나 악신의 역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과 공포로 이기심을 증진케 하며 건강도 해롭게 한다. 그러므로 영적인 역사는 원리를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그것을 분별하기가 대단히 어렵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 결과를 보아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인간은 하나님도 사탄도 모두 대할 수 있는 중간위치에 있기 때문에 선신의 역사인 경우에도 악신의 역사를 겸행하는 때가 있다. 또 악신의 역사도 어느 기간을 지나면 선신의 역사를 겸행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원리를 모르는 입장에서는 이것을 분별하기가 곤란하다. 오늘날에 있어 많은 교역자들이 이에 대한 무지에서 선신의 역사까지도 악신의 것으로 몰아, 하늘 ‘뜻’에 상반되는 처지에 서게 되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영적인 현상이 점점 많아지는 오늘날에 있어서, 선신과 악신의 역사를 잘 분간하여 분립할 수 없는 한 영통인들을 지도할 수는 없는 것이다.
Ⅴ. 죄
죄라는 것은 사탄과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할 수 있는 조건을 성립시킴으로써, 천법을 위반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죄를 분류해 보면, 첫째로 원죄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조상이 저지른 영적 타락과 육적 타락에 의한 혈통적인 죄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원죄는 모든 죄의 뿌리가 되고 있다.
둘째로는 유전적 죄가 있다. 이것은 부모가 지은 죄가 몇대에 이른다고 한 십계명의 말씀과 같이,혈통적인 인연으로 그 후손들이 물려받은 선조의 죄를 말한다.
셋째로는 연대적 죄가 있다. 자신이 범죄하지도 않았고 또 유전적인 죄도 아니지만, 연대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죄다. 제사장과 교법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준 죄로 말미암아, 유대인 전체가 그 책임을 지고 하나님의 벌을 받았고 전 인류도 공동적인 책임을 지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고난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넷째로 자범죄가 있으니 이것은 자신이 직접 범한 죄다.
여기에서 우리가 앞에 적은 바와 같이 원죄를 죄의 뿌리라고 한다면, 유전적인 죄는 죄의 줄기, 연대적인 죄는 죄의 가지, 자범죄는 죄의 잎에 해당하는 것이다. 모든 죄는 그의 뿌리되는 원죄로 말미암아서 생긴다. 그러므로 원죄를 청산하지 않고는 다른 죄를 근본적으로 청산할 수 없다. 그러나숨어 있는 이 죄의 뿌리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인간의 뿌리로서 참부모로 오시는 예수님만이 이것을 알고 청산하실 수 있는 것이다.
Ⅵ. 타락성본성
천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해와와 혈연관계를 맺을 때에, 우발적으로 일어났던 모든 성품을 해와가 계승하였고, 이렇게되어서 천사장의 입장에 서게 된 해와와 다시 혈연관계를 맺은 아담도 그 성품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성품이 타락인간의 모든 타락성을 유발하는 근본된 성품이 되었다. 이것을 말하여 타락성근성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타락성근성이 생기게 된 근본동기는 천사장이 아담에 대하여 질투심을 갖게 된 데 있었다. 그러면 선의 목적을 위하여 창조된 천사 장에게서, 어떻게 되어 사랑에 대한 질투심이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인가?
원래 천사 장에게도 그의 창조본성으로 욕망과 지능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천사 장은 지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에게 오는 그것보다 크다는 것을 비교하여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며, 또 그에게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자동적으로 질투심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질투심은 창조본성으로부터 유발되는 불가피한 부산물로서, 마치 빛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물체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완성되면 이러한 부수적인 욕망으로 인하여서는 결코 타락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욕망을 충당할 때에 느껴지는 일시적인 만족감보다도, 그 욕망을 충당함으로써 일어나는 자기 파멸에 대한 고통이 더 클 것을 실감하게 됨으로써, 그러한 범행은 감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조목적을 완성한 세계는, 마치 사람 하나의 모양과 같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는 조직사회이기 때문에, 개체의 파멸은 곧 전체적인 파멸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의 파멸을 방임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창조목적을 완성한 세계에 있어서의 창조본성으로부터 일어나는 부수적인 욕망은, 인간의 발전을 가져오게 하는 요소는 될지언정 결코 타락의 요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타락성본성을 대별하면 넷으로 가를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과 같은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천사장이 타락하게 된 동기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담을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사랑하지 못하고, 그를 도리어 시기하여 해와의 사랑을 유린한 데 있다. 군왕이 사랑하는 신하를 그의 동료가 그 군왕과 같은 입장에서 같이 사랑하지 못하고 시기하는 성품은, 바로 이런 타락성근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둘째로 자기의 위치를 떠나는 것이다. 누시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하여, 천사세계에서 가졌던 것과 동일한 사랑의 위치를, 인간세계에 있어서도 가지려 하였던 불의한 욕망으로 인하여 자기의 위치를 떠나 타락하게 되었다. 불의한 감정으로 자기의 분수와 위치를 떠나 행동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타락성본성의 발로인 것이다.
셋째는 주관성을 전도하는 것이다. 인간의 주관을 받아야 할 천사가 거꾸로 해와를 주관하였고,또 아담의 주관을 받앙야 할 해와가 거꾸로 아담을 주관하게 된 데서 타락의 결과가 생겼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의 위치를 떠나서 주관성을 전도하는 데서부터 인간사회의 질서는 문란해지게 되는데, 이것은 모두 이러한 타락성근성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넷째는 범죄행위를 번식하는 것이다. 만일 해와가 타락한 뒤에 자기의 범죄를 아담에게 번식시키지 않았더면 아담은 타락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해와만의 복귀는 쉬웠을 것이었다. 그러나 해와는 이와 반대로 자기의 죄를 아담에게도 번식시켜 그를 타락케 하였다. 악인들이 동료를 번식시키려는 성품은 이와 같은 타락성근성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Ⅰ. 자유의 원리적 의의
자유에 대한 원리적인 성격을 논할 때, 첫째로 우리는 원리를 벗어난 자유는 없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유라고 하는 것은 자유의지와 그에 따르는 자유행동을 일괄하여 표현한 말이다. 전자와 후자는 성상과 형상과의 관계와 같아서, 이것이 합하여서만 완전한 자유가 성립된다.그러므로 자유의지가 없는 자유행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자유행동이 따르지 않는 자유의지도 완전한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유행동은 자유의지로 인하여 나타나는 것이며, 자유의지는 곧 마음의 발로 인 것이다. 그런데 창조본연의 인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 곧 원리를 벗어나서 그 마음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원리를 벗어난 자유의지나 그로 인한 자유행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본연의 인간에 있어서는, 원리를 벗어난 자유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책임 없는 자유는 없다. 원리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은 그 자신의 자유의지로써 그의 책임을 완수함으로써만 완성된다(전편 제1장 제5절 Ⅱ.2). 따라서 창조목적을 추구하여 나아가는 인간은 항상 자유의지로써 자기의 책임을 행하려 하기 때문에 책임 없는 자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세째로 실적 없는 자유는 없다. 인간이 자유로써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하려는 목적은, 창조목적을 완성하여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실적을 세우려는 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는 항상 실적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므로, 실적 없는 자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Ⅱ. 자유와 인간의 타락
위에서 자세히 말한 바와 같이 자유는 원리를 벗어나서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자유는 스스로의 창조 원리적인 책임을 지게 되며,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실적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자유의지에 의한 자유행동은 선의 결과만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로 인하여서 타락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유를 본심의 자유라고 한다.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권고를 받은 이상,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간섭이 없이 오직 본심의 자유에 의하여 그 명령을 지켜야 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해와가 원리를 이탈하려 하였을 때, 원리적인 책임과 실적을 추구하는 그의 본심의 자유는, 그에게 불안과 공포심을 일으키게 하여 원리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타락된 뒤에 있어서도, 이 본심의 자유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도록 작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작용을 하는 본심의 자유로 인하여 타락될 수는 없다. 인간의 타락은 어디까지나 그의 본심의 자유가 지향하는 힘보다도 더 강한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 자유가 구속되었던 데 기인한다.
결국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에게도 이 자유를 추구하는 본성만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자유를 복귀하는 섭리를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역사가 흐를수록 인간이 자기의 생명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자유를 찾으려는 심정이 고조되어 가는 것은, 인간이 사탄으로인하여 잃어버렸던 이 자유를 복귀해 나아가고 있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를 찾는 목적은, 자유의지에 의한 자유행동으로 원리적인 책임과 실적을 세워서, 창조목적을 완성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Ⅲ. 자유와 타락과 복귀
천사는 인간을 받들어 모시도록 창조되었다. 따라서 인간이 천사를 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유에 속한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천사에게 유혹을 당하던 때의 해와는, 아직도 지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미완성기에 있었다. 따라서 해와가 천사의 유혹에 의하여, 지적으로 미혹되고 심정적으로 혼돈 되어 유인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책임과 실적을 추구하는 본심의 자유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불안을 느꼈으나, 보다 더 큰 천사와의 사랑의 힘에 의하여 타락선을 넘고 말았다.
해와가 아무리 천사를 자유로이 대하였다 하더라도, 따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계명만을 믿고 천사의 유혹의 말에 상대하지 않았더면, 천사와의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은 발동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그는 결코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자유가 해와로 하여금 천사를 상대하게 하여 타락 선까지 끌고 나갔던 것은 사실이지만, 타락선을 넘게 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유가 아니고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천사에 대해서도 자유로써 대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해와가 누시엘을 대하게 되어, 그와 상대기준을 조성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타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타락인간도 자유로써 하나님의 상대적인 입장에 설 수 있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그 원리적인 사랑의 힘으로 말미암아 창조본성을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이 본성적으로 자유를 부르짖게 되는 것은, 이와 같이하여서 창조본성을 복귀하려는 본심의 자유의 지향성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무지에 떨어져 하나님을 모르게 됨에 따라서 그의 심정도 모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는 이 무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을 취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타락인간에 있어서는 복귀섭리의 시대적인 혜택에 의하여, 신령(내적인 지)과 진리(외적인 지)가 밝혀짐에 따라, 창조목적을 지향하는 본심의 자유를 찾으려는 심정도 복귀되어 왔고, 그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심정도 점차로 복귀되어 그 뜻대로 살려는 의지도 높아 가는 것이다.
또 그들은 이와 같이 자유를 복귀코자 하는 의지가 고조됨에 따라서,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환경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환경에 자유를 찾는 그 시대의 인간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을 때 필연적으로 사회혁명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18세기에 있어서 프랑스혁명은 그 대표적인 예이지만, 이러한 혁명은 결국 창조본연의 자유가 완전히 복귀될 때까지 계속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제6절 하나님이 인간조상의 타락행위를 간섭하시지 않은 이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인간조상의 타락행위를 모르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 한편 그들이 타락행위를 감행할 수 없도록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없으신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들의 타락행위를 아시면 서도 그것을 간섭하여 막지 않으셨던가? 이것은 아직까지의 인류역사를 통하여 풀려지지 않은 중대한 문제중의 하나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행위를 간섭치 않으신 이유로서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창조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음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을 주관하시듯이 인간도 만물세계를 주관하도록 창조하였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기 위하여는, 인간 자신의 책임분담을 수행하면서 성장하여 완성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러한 성장기간을 우리는 간접주관권 혹은 원리결과주관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주관권내에 있을 때에는 그들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직접적으로 주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완성된 뒤에야 그들을 직접 주관하시게 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직접 주관하실 수 없는 성장기간에 있어서 그들의 행위를 간섭하시게 되면 인간의 책임분담을 무시하는 것이 되므로, 따라서 인간에 창조성을 부여하시어 만물의 주관주로 세우시려는 창조원리를 스스로 무시하는 입자에 서시게 된다. 이와 같이 원리가 무시되면, 동시에 원리의 절대성과 완전무결하신 창조주이시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원리도 또한 절대적이며 완전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원리의 절대성과 완전무결성을 위하여, 미완성기에 있는 그들의 타락행위를 간섭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하신 원리적인 존재와 그 행동만을 간섭하시기 때문에, 범죄행위나 지옥과 같은 자기가 창조하시지 않은 비원리적인 존재나 행동은 간섭하실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일 어떠한 존재나 행동을 간섭하시게 되면, 간섭을 받은 그 존재나 행동은 벌써 창조의 가치가 부여되어, 원리적인 것으로서 인정된 것과 같은 결과에 이르게 되는 거다.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 볼 때, 만일 하나님이 인간시조의 타락행위를 간섭하시게 되면 그 타락행위에도 창조의 가치가 부여되어서, 그 범죄행위는 원리적인 것으로서 인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만일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범죄행위도 원리적인 것으로서 인정하신다는, 또 하나의 새로운 원리를 세우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은 어디가지나 사탄 때문이므로, 그렇게 되면 사탄이 또 하나의 새로운 원리를 창조한 것이 되어 그도 역시 창조주의 입장에 서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홀로 하나님만이 창조주로 계시기 위하여 그들의 타락행위를 간섭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주관하라고 하셨다(창세기 1장 28절).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물을 주관하려면, 만물과 동등한 처지에서는 그를 주관할 수 없으므로 인간은 그를 주관할 수 있는 어떠한 자격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주관하실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계시는 것과 같이, 인간도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창조성을 갖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창조성을 부여하시어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하시기 위하여, 성장기간을 두시고 이 기간이 다하기까지 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완성되도록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원리과정을 통하여 완성됨으로써만,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가지고 비로소 만물을 주관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미완성기에 있는 인간을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시고 간섭하시게 되면, 이것은 아직도 인간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창조성을 갖지 못함으로써 만물을 주관할 자격이 없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주관케 하시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미완성한 인간과 동일한 취급을 하신다는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 그리고 또 이 인간에게 그의 창조성을 부여하심으로서 만물을 주관케 하시기 위하여 세우셨던 창조원리를 스스로 무시하시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리에 의하여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고 그 원칙을 따라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리에 세우시기 위하여 아직도 간접주관권내에 있었던 미완성한 인간의 타락행위를 간섭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