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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인류역사 종말론

  • 인류역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인가? 역사의 종말은 있는 것이며 또 언제인 것인가?
  • 성서에는 말세에 천변지이가 일어날 것으로 예언되어 있는데 그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 말세에 처한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제3장 인류역사 종말론

우리는 지금까지, 인류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 이것이 어디를 향하여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를 모르고 살아왔다. 따라서 인류역사의 종말에 관한 문제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 신도들은 다만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 말세에는 하늘과 땅이 모두 불에 타서 소멸되고(베드로후서 3장 12절{{ 베드로후서 3장 12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마태복음 24장 29절{{ 마태복음 24장 29절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구름 속으로 끌어 올리어 공중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리라고(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 17절{{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 – 17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 성서의 문자 그대로 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성서의 중요한 많은 부분이 그러하듯이, 이 말씀도 무엇을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인지, 이 문제를 해명하는 것은 기독교 신도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는, 먼저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 타락의 의의와, 그리고 구원섭리의 목적은 근본문제를 풀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제1절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완성과 인간의 타락

1.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완성

이미 창조원리에서 상세히 논술한 바이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을 보시고 기뻐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되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그의 창조본연의 존재가치를 완전히 나타낼 수 있을 것인가?

인간 이외의 피조물은 자연 그대로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도록 창조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원리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자유의지와 그에 의한 행동을 통하여서 밝혀진 바와 같이, 자유의지와 그에 의한 행동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기쁨을 돌려 드리는 실체대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스스로 노력하여서, 그 뜻대로 생활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여 그 뜻을 알아 가지고, 그 뜻대로 생활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던 것이다. 인간이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을 개성완성이라고 한다.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타락 전의 아담, 해와나 선지자들이 하나님과 일문일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인간에게 이와 같이 창조되었던 소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성을 완성한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는, 몸과 마음과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 몸은 마음이 깃드는 하나의 집으로서, 마음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한다. 이와 같이 개성을 완성한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사시게 되므로, 결국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만 생활하게 된다. 따라서 몸과 마음이 일체를 이루는 것과 같이, 개성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4장 20절에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와같이 개성을 완성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이룸으로써, 성령이 그 안에 살게 되어 하나님과 일체를 이룬 인간은 신성을 갖게 되므로 죄를 지으려야 지을 수 없게 되고, 따라서 타락할 수도 없게 된다.

개성을 완성한 사람은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룬 선의 완성 체인데, 선의 완성 체가 타락된다면 선 그 자체가 파멸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불합리한 결과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완성된 입장에서 타락되었다면 하나님의 전능성마저 부정될 수밖에 없다. 영원한 주체로 계시는 절대자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도 영원성과 절대성을 가져야 하므로, 개성을 완성한 인간은 절대로 타락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개성을 완성하여 죄를 지을 수 없게 된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축복하신 말씀대로(창세기 1장 28절{{ 창세기 1장 28절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선의 자녀를 번식하여 죄 없는 가정과 사회를 이루었다면, 이것이 바로 한 부모를 중심한 대가족으로 이루어지는 천국이었을 것이다. 천국은 마치 개성을 완성한 사람 하나 모양과 같은 세계여서, 인간에 있어 그 두뇌의 종적인 명령에 의하여 그의 사지백체가 서로 횡적인 관계를 가지고 활동하듯이, 그 사회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종적인 명령에 의하여, 서로 횡적인 유대를 맺어 생활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 있어서는, 어느 한 사람이라도 고통을 당하면 그것을 보시고 같이 서러워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사회전체가 그대로 체휼하게 되기 때문에, 이웃을 해치는 행위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아무리 죄 없는 인간들이 생활하는 사회라 하더라도, 인간이 원시인들과 마찬가지로 미개한 생활들을 그대로 할 수밖에 없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바라시고 또 인간이 원하는 천국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물을 주관하라고 하신 말씀대로(창세기 1장 28절), 개성을 완성한 인간들은 과학을 발달시켜 자연계를 정복함으로써, 극도로 안락한 사회환경을 이 지상에 이루어 놓아야 하는 것이니, 이러한 창조이상이 실현된 곳이 바로 지상천국인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완성되어 지상천국을 이루고 살다가 육신을 벗고 영계로 가게 되면, 바로 거기에 천상천국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어디까지나 먼저 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2. 인간의 타락

창조원리에서 자세히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아직도 성장기간에 있어서, 미완성한 입장에 있었을 때에 타락되었다. 인간에게는 왜 성장기간이 필요하였으며, 인간시조가 미완성기에서 타락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도 이미 창조원리에서 밝혔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지 못하고 사탄이 들어와 사는 집이 되어 그와 일체를 이룸으로써, 신성을 갖지 못하고 악성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악성을 가진 인간이 악의 자녀를 번식하여 악의 가정과 사회와 세계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바로 타락인간이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 지상지옥이다. 지옥인간들은 하나님과의 종적인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의 횡적인 유대를 이룰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서 체휼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는 이웃을 해치는 행위를 자행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지상지옥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육신을 벗은 후에는 천상지옥으로 가게 된다. 이와 같이인간은 하나님 주권의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사탄 주권의 세계를 이루게 되었다. 사탄을 ‘세상임금'(요한복음 12장 31절{{ 요한복음 12장 31절 :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 또는 ‘세상의 신'(고린도후서 4장 4절{{ 고린도 후서 4장 4절 :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제2절 구원섭리

1. 구원섭리는 곧 복귀섭리다.

이 죄악의 세계는 인간이 서러워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도 서러워하시는 세계인 것이다(창세기 6장6절{{ 창세기 6장 6절 :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설움의 세계를 그대로 방치하실 것인가? 기쁨을 누리시려고 창조하셨던 선의 세계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설움이 가득한 죄악의 세계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설움이 가득한 죄악의 세계로 영속할 수밖에 없이되었다.면, 하나님은 창조에 실패한 무능한 하나님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필코 이 죄악의 세계를 구원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세계를 어느 정도로 구원하셔야 할 것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그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어야 하므로,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이 죄악의 세계에서 사탄의 악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사도행전 26장 18절{{ 사도행전 26장 18절 :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 먼저 인간시조가 타락하기 전의 입장을 복귀하는 데까지 구원하시고, 그 위에 선의 창조목적을 완성하시어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시는 데까지(사도행전 3장 21절{{ 사도행전 3장 21절 :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 나아가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병든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은 병들기 전의 상태로 복귀시킨다는 뜻이요,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한다는 것은 곧 빠지기 전의 입장으로 복귀시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죄에 빠진 자를 구원한다는 것은 곧 죄가 없는 창조본연의 입장으로 복귀시킨다는 뜻이 아닐 것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곧 복귀섭리인 것이다(사도행전 1장 6절{{ 사도행전 1장 6절 :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 마태복음 17장 11절{{ 마태복음 17장 11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

타락은 물론 인간 자신의 과오로 말미암아 되어진 결과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이란 결과도 있을 수 있었으므로, 하나님은 이 결과에 대하여 창조주로서의 책임을 지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잘못된 결과를 창조본연의 것으로 복귀하시려는 섭리를 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복귀하시려는 섭리를 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주체이시므로, 그의 영원한 기쁨의 대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생명도 역시 영원성을 갖지 않으면 아니된다. 인간에게는 이와 같이 영원성을 두고 창조하셨던 창조 원리적인 기준이 있기 때문에, 타락된 인간이라고 해서 이를 아주 없애버리어 창조원리를 무위로 돌려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타락인간을 구원하시어 그를 창조본연의 입장으로 복귀하시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3대 축복을 이루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이므로(창세기 1장 28절{{ 창세기 1장 28절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이사야 46장 11절{{ 이사야서 46절 11절 :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 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 즉 정녕 행하리라. }}에 “내가 말하였은 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 즉 정녕 행하리라”고하신 말씀대로, 사탄 때문에 잃어버렸던 이 축복들을 복귀하는 섭리를 하심으로써, 약속의 뜻을 이루어 나오셨던 것이다. 마태복음 5장 48절{{ 마태복음 5장 48절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 전하라. }}에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 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도, 곧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하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본연의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신성을 갖게 됨으로써, 창조목적을 중심하고 보면 하나님과 같이 완전하기 때문이다.

2. 복귀섭리의 목적

그러면 복귀섭리의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었던 선의 대상인 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지상에 창조하시고, 그들을 중심하고 먼저 지상천국을 이루시려 하셨다. 그러나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던 것이기 때문에, 복귀섭리의 제1차적인 목적도 역시 지상천국을 복귀하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복귀섭리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이나(마태복음 6장 10절{{ 마태복음 6장 10절 :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하신 말씀(마태복음 4장 17절{{ 마태복음 4장 17절 :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등은 모두 복귀섭리의 목적이 지상천국을 복귀하시려는 데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3. 인류역사는 곧 복귀섭리역사다

우리는 위에서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바로 복귀섭리라는 것을 밝혔다. 그러므로 인류역사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여, 그들로 하여금 창조본연의 선의 세계를 복귀케 하시려는 섭리역사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류역사는 곧 복귀섭리 역사라는 것을 여러 면으로 고찰해 보기로 하자.

첫째로 문화권 발전사의 입장에서 고찰해 보기로 하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리 악한 인간일지라도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려는 본심만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떻게 해야 선을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은 지능에 속하는 것이어서, 시대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기 때문에, 선을 찾아 세우려는 그들의 근본목적만은 모두 동일하다.

그러면 어찌하여 인간은 본심은 누구도 막을 수없는 힘을 가지고 시공을 초월하여 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선의 실체대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으므로, 비록 타락인간은 사탄의 역사로 말미암아 선의 생활은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선을 추구하는 그 본심만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들로써 이어져 내려오는 역사의 갈 곳은 결국 선의 세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본심이 아무리 선을 지향하여 노력한다고 하여도, 이미 악주권 아래 놓여진 이 세계에서는 그 선의 실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시공을 초월한 세계에서 그 선의 주체를 찾으려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니, 이러한 필연적인 요구에 의하여 탄생된 것이 바로 종교인 것이다. 이와 같이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모르게 된 인간은, 종교를 세워 끊임없이 선을 찾아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을 만나려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설혹 종교를 받들고 있었던 개인이나 민족이나 국가는 망하였다 할지라도, 종교 그 자체만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남아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국가흥망사를 중심하고 더듬어 보기로 하자.

먼저 중국의 역사를 보면, 춘추전국의 각 시대를 거치어 진 통일 시대가 왔고, 전한, 신, 후한, 삼국, 서진, 동진, 남북조의 각 시대를 거치어 수 당 통일시대가 왔으며, 오대, 북송, 남송, 원, 명, 청의 시대를 거치어 오늘의 중화민국에 이르기까지 복잡다양한 국가의 흥망과 정권의 교체를 거듭하여 내려왔으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 불. 선의 극동종교만은 엄연히 그대로 남아져 있다.

다음으로 인도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마우리아, 안드라, 굽다, 바루다나, 사만, 가즈니, 무갈 제국을 거쳐서 오늘의 인도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변천은 거듭되어 내려왔으나 힌두교만은 쇠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중동지역의 역사를 보면 사라센제국, 동. 서 칼리프, 셀주크 터어키, 오스만 터어키 등 나라의 주권은 여러 차례 바뀌어 내려왔으나, 그들이 신봉하는 이슬람교만은 연면하게 그 명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다.

나아가 유럽사의 주류에서 그 실증을 찾아보기로 하자. 유럽의 주도권은 그리스, 로마, 프랑크, 스페인과 폴투갈을 거쳐 일시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지나 영국으로 옮겨갔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미국과 소련으로 나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그대로 융흥해 왔으며, 유물사관 위에 세워진 전제정체하의 소련에서마저 기독교는 아직도 멸할 수 없는 것으로서 남아져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모든 국가 흥망의 발자취를 깊이 더듬어 보면, 종교를 박해하는 나라는 망하였고, 종교를 보호하고 육성시킨 나라는 흥하였으며, 그 나라의 주권은 보다 더 종교를 숭앙하는 나라에로 넘겨져간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종교를 박해하고 있는 공산주의 세계가 괴멸될 날이 기필코 오리라는 것은 종교사가 실증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에는 많은 종교가 생멸되었다. 그 가운데서 영향력이 큰 종교는 반드시 문화권을 형성하여 왔는데, 문헌에 나타나 있는 문화권만 해도 21 내지 26개나 된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열등한 것은 보다 우수한 것에 흡수되었거나 또는 융화되어 왔다. 그리하여 근세에 이르러서는 위에서 열거한대로 수다한 국가 흥망의 굽이침 속에서, 결국 극동문화권, 인도교문화권, 회회교문화권, 기독교문화권 등의 4대 문화 군이 남아지게 되었고, 이것들은 다시 기독교를 중심한 하나의 세계적인 문화군을 형성해 가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선을 지향해 온 모든 종교의 목적을 함께 달성해야 할 초종교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역사적인 귀추로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문화권의 발전사가, 수많은 종교의 성쇠 또는 융합에 딸, 결국 하나의 종교를 중심한 세계적인 문화권을 형성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인류역사가 바로 하나의 통일된 세계에로 복귀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둘째로, 종교와 과학의 동향으로 보아도, 우리는 인류역사가 복귀섭리의 여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타락인간의 양면의 무지를 극복하기 위한 종교와 과학이, 오늘에 이르러서는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함은 이미 총서에서 논술하였다. 이와 같이 역사이래 서로 관련이 없이 독자적으로 발달해 온 종교와 과학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각각 제 갈 곳을 다 가서, 한 자리에서 서로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인류역사가 이제까지 창조본연의 세계를 복귀하는 섭리노정을 걸어나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타락되지 않았다면, 인간의 지능이 영적인 면에서 최고도에까지 향상하였었을 것이기 때문에, 육적인 면에서도 최고도로 발달되어, 과학은 그 때 극히 단시일 내에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과학사회는 벌써 인간시조 당시에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무지에 빠지게 되면서, 그러한 사회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유구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과학으로써 그 무지를 타개하면서 창조본연의 이상적 과학사회를 복귀하여 나왔다. 그런데 오늘의 과학사회는 극도로 발달되어, 외적으로는 이상사회에로 전환될 수 있는 그 전 단계에까지 복귀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투쟁역사의 귀추로 보아도, 인류역사는 복귀섭리역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재물을 빼앗고 땅을 빼앗으며 사람을 빼앗으려는 싸움은, 인류사회의 발달과 더불어 벌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되어왔다. 그리고 이 싸움은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중심한 싸움으로 그 범위를 넓혀 나와, 오늘에 이르러는 민주와 공산 두 세계가 마지막 싸움을 겨루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제 인류역사의 종말을 고하는 이 마지막 때에 있어서, 천륜은 드디어 재물이나 땅이나 사람을 빼앗아 가지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 온 역사의 단계를 지나서,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띠고 이 땅에 찾아왔다. 1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패전국가가 식민지를 내놓더니, 2차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전승국가들이 차례로 식민지를 내놓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편 오늘의 강대국들은, 그들의 일개 도시만도 못한 약소국가들을 유엔에 가입시키고, 그들을 먹여 살릴 뿐 아니라, 자기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주어, 모두 형제국가들을 만들고 있다.

그러면 이 마지막 싸움이란 어떠한 싸움일 것인가? 그것은 이념의 싸움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유물사관을 완전히 전복시킬 수 있는 진리가 나오지 않는 한, 민주와 공산의 두 세계의 싸움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을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 해결할 수 있는 진리가 나올 때, 비로소 종교를 부인하고 과학편중의 발달을 꾀해 나온 공산주의 사상은 전복되고, 두 세계는 하나의 이념 아래 완전히 통일될 것이다. 이와 같이 투쟁역사의 귀추로 보아도 인류역사는 창조본연의 세계를 복귀하는 섭리역사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성서를 중심하고 좀더 이 문제를 알아보기로 하자. 인류역사의 목적은 ‘생명나무'(창세기 2장 9절{{ 창세기 2장 9절 :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를 중심한 에덴동산을 복귀하려는 데 있다(전편 제2장 제1절 1). 그런데 에덴동산은 아담과 해와가 창조된 어떤 국한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를 의미한다. 만일 에덴동산이, 인간시조가 창조되었던 그 어느 한정된 지역만을 말한다면, 이 땅에 충만하도록 번성하라 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창세기 1장 28절{{ 창세기 1장 28절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에 의하여 번식될 그 숱한 인류가 어떻게 그 좁은 곳에서 다 살 수 있을 것인가?

인간조상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중심하고 세우려던 에덴동산은 사탄에게 내주게 되었었다(창세기 3장 24절{{ 창세기 3장 24절 :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 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 그래서 알파로 시작된 인류 죄악역사가 오메가로 끝날 때의 타락인간의 소망은, 죄악으로 물든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복귀된 에덴동산으로 다시 들어가, 잃어버렸던 그 ‘생명나무’를 다시 찾아 나아가는 데 있다고 요한계시록 22장 13절{{ 요한계시록 22장 13 – 14절 :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 이하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이 성서의 내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타락론에서 밝혀진 바이지만, ‘생명나무’는 완성한 아담 곧 인류의 참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다. 부모가 타락되어 그의 후손도 원죄를 가진 자녀들이 되었으니, 이 죄악의 자녀들이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되기 위하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두 거듭나지(중생) 않으면 아니된다(중생론 참조). 그러므로 역사는 인류를 다시 낳아 주실 참 아버지 되시는 예수님을 찾아 나온 것이니, 역사의 종말 기에 들어 성도들이 소망하고 찾아 나아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요한계시록의 ‘생명나무’는 바로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서의 기록을 보아도, 역사의 목적은 ‘생명나무’로 오실 예수님을 중심한 창조본연의 에덴동산을 복귀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 내지 7절{{ 요한계시록 21장 1 – 7절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더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에도, 역사의 종말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사탄의 주관 하에 있던 옛 하늘과 옛 땅으로 복귀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19절 내지 22절에는 사탄의 주관 하에서 탄식하고 있는 말세에 불에 타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본연의 입장으로 복귀함으로써 새롭게 되기 위하여(요한 계시록 21장 5절{{ 요한계시록 21장 5절 :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 자기를 주관해 줄 수 있는 창조본연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복귀되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여러 면으로 고찰하여 볼 때, 인류역사는 창조본연의 세계에로 복귀하는 섭리역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제3절 말세

1. 말세의 의의

하나님이 인간조상에게 허락하셨던 3대 축복은 그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중심하고 이루어지지 않고, 사탄을 중심하고 비원리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논술하였다.

그런데 악으로 시작된 인류역사는 실상 하나님의 복귀섭리 역사이기 때문에, 사탄주권의 죄악세계는 메시아의 강림을 전환점으로 하여, 하나님을 중심하고 3대 축복을 이룬 선주권의 세계로 바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탄주권의 죄악세계가 하나님 주권의 창조이상세계에로 교체되는 시대를 말세라고 한다. 따라서 말세는 지상지옥이 지상천국으로 바뀌어지는 때를 이르는 것이다.그러므로 이때는 지금까지 기독교 신도들이 믿어온대로의 천변지이가 일어나는 공포의 때가 아니고, 창세이후 유구한 역사노정을 통하여 인류가 유일한 소망으로 바라고 나왔던 기쁨의 한 날이 실현되는 때인 것이다.

상세한 것은 후편 제1장으로 미루거니와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이래, 죄악세계를 청산하고 창조본연의 선의 세계를 복귀하시려는 섭리를 여러 차례 하셨다. 그러나 그때마다 인간이 그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여,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곤 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말세가 여러 번 있었던 것 같은 사실을 우리는 성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1) 노아 때도 말세였다

창세기 6장 13절{{ 창세기 6장 13절 :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 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의 기록을 보면 노아 때도 말세였기 때문에, 끝날 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어찌하여 노아 때가 말세였던가? 하나님은 인간시조가 타락함으로써 시작된 사탄을 중심한 타락세계를, 1600년의 죄악 사를 일기로 하여 홍수심판으로 멸하시고, 하나님만을 신봉하는 노아가정을 세우심으로써, 그 믿음의 터 위에 하나님주권의 이상세계를 복귀하려 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노아 때가 말세였던 것이다(후편 제1장 제2절 참조). 그러나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그들이 인간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창세기 9장 22절{{ 창세기 9장 22절 :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

2) 예수님 때도 말세였다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이어서 변할 수 없기 때문에(전편 제6장),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다시 다른 선지자들을 부르시어 믿음의 터를 닦으시고, 그 터 위에 예수님을 보내심으로써, 사탄을 중심한 죄악의 세계를 멸하시고 하나님을 중심한 이상세계를 복귀하려 하셨다. 따라서 예수님 때도 말세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스스로 심판 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고(요한복음 5장 22절{{ 요한복음 5장 22절 : 아버지께서 아무도 비판하지 아니하시고 비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그 때도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말라기 4장 1절{{ 말라기 4장 1절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이라고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창조이상세계를 복귀하려고 오셨던 것이었으나, 유대인들이 그를 불신함으로써 인간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뜻도 이루어지지 않고 재림 때에로 다시 연장되었다.

3) 예수님의 재림 때도 말세다

유대 민족의 불신을 당하게 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영적인 구원만을 이루셨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재림하신 후에야 영 육 아울러 구원섭리의 목적을 완수하여(전편 제4장 제1절 4) 지상천국을 복귀하시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 때도 또한 말세인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재림 때)에도 그러하리라”(누가복음 17장 26절{{ 누가복음 17장 26절 :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고 말씀하셨고, 그가 재림하실 때도 말세가 되어 천지에 이변이 일어날 것으로 말씀하셨던 것이다(마태복음 24장 29절{{ 마태복음 24장 29절 :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

2. 말세의 징조에 관한 성구

이미 위에서 논한 바대로, 많은 기독교 신도들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 말세에는 천지에 이변이 일어나며, 인간사회에도 현대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변이 생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창조본연의 세계를 복귀해 가는 섭리역사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말세의 징조는 실제에 있어서 그 문자대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말세에 관한 성서의 모든 기록은 각각 무엇을 상징한 것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1) 하늘과 땅을 멸하고(베드로후서 3장 12절)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심(요한계시록 21장 1절, 베드로후서 3장 13절, 이사야 66절 22절)

창세기 6장 13절을 보면 노아 때도 말세가 되어 땅을 멸한다고 하셨지만, 사실상 멸하지는 않으셨다. 전도서 1장 4절에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라고 하신 말씀이나, 시편 78편 69절에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라고 하신 말씀을 보더라도, 땅은 영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이 영원하시니, 그의 대상도 영원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대상으로 창조된 땅도 영원한 것이 아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사탄으로 말미암아 파멸되어 없어질 세계를 창조하시고 기뻐하셨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그 말씀은 무엇을 비유하신 것인가? 한 국가를 멸한다는 것은 그의 주권을 멸한다는 것을 의미함이요, 또 새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은(요한계시록 21장 1절{{ 요한계시록 21장 1절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새 주권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과 땅을 멸한다는 것은 그를 주관하고 있는 사탄주권을 멸한다는 뜻이요, 또 하늘과 새 땅을 세운다는 것은 예수님을 중심한 하나님 주권하의 새로운 천지를 복귀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2) 하늘과 땅을 불로써 심판하심(베드로후서 3장 12절)

베드로후서 3장 12절을 보면 말세에는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진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말라기 4장 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 때도 그가 심판 주로 오셔서(요한복음 5장 22절, 요한복음 9장 39절) 불로써 심판하신다고 예언되어 있고, 또 누가복음 12장 49절에는 예수님이 불을 땅에 던지러 오셨다는 말씀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예수님이 불로써 심판하신 아무 흔적도 우리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엇을 비유하신 것임에 틀림없다. 야고보서 3장 6절에 “혀는 곧 불이요”라고 한 말씀에 의하여, 불 심판은 곧 혀의 심판이요, 혀의 심판은 곧 말씀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니, 불 심판은 곧 ‘말씀’심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말씀’심판에 관한 성구의 예를 찾아보자. 요한복음 12장 48절에는, 예수님을 저버리고 그의 말씀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였으며, 데살로니가후서 2장 8절에는,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 즉 말씀으로 그를 죽이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사야 11장 4절에서는, 그 입의 막대기(혀)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말씀)으로 악인을 죽이 리라고도 말씀하였으며, 요한복음 5장 24절을 보면 예수님이 자기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고 하신 말씀이 있다. 이와 같이 불 심판은 곧 ‘말씀’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말씀’으로 심판하시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요한복음 1장 3절에 인간은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인간 시조가 ‘말씀’의 실체로서 ‘말씀’의 목적을 완수해야 할 것이었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타락되어 ‘말씀’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또다시 ‘말씀’에 의하여, 타락인간을 재창조하심으로써 ‘말씀’의 목적을 이루려 하셨으니, 이것이 곧 진리(성서)에 의한 복귀섭리인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또 ‘말씀’ 완성 자로 재림하셔서, 스스로 ‘말씀’심판의 기준이 됨으로써, 모든 인류가 어느 정도 ‘말씀’의 목적을 이루었는가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이렇듯 복귀섭리의 목적이 ‘말씀’의 목적을 이루려는데 있으므로, 그 목적을 위한 심판도 ‘말씀’으로 그의 기준을 세워 행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누가복음 12장 49절에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씌어 있는 바,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의 실체로 오셔서(요한복음 1장 14절) 생명의 ‘말씀’을 이미 선포하셨으나, 유대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시고 한탄하여 하신 말씀이다.

3) 무덤에서 시체가 일어남(마태복음 27장 52절,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마태복음 27장 52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썩어 버린 그들의 육신이 다시 일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전편 제5장 제2절 3). 만일 영계에 머물러 있던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성서의 문자 그대로 무덤에서 살아 나와 성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반드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때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을지라도, 그들의 증언을 듣고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었을 것인가? 그리고 그렇듯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육신을 쓰고 무덤에서 다시 일어났다면, 그 후의 그들의 행적에 관한 기사가 반드시 성서에 남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에는 그들에 관한 아무런 기사도 달리 씌어 있지 않다.

그러면 무덤에서 살아 나온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마치 ‘모세’와 ‘엘리야’의 영인 체가 변화산상에서 예수님 앞에 나타났었던 것처럼(마 17:3), 구약시대의 영인들이 재림부활을 위하여 지상에 재림한 것을 영안으로 보고(전편 제5장 제2절 3) 기록한 말씀이다.

그러면 무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려진 낙원에서 보면,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머물러 있던 영형 체급 영인의 세계는 보다 어둠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 곳을 가리켜 무덤이라고 하였다. 구약시대의 영인들은 모두 이 영계에 머물러 있다가 지상성도들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4) 지상인간들이 끌어 올리워 공중에서 주를 영접함(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공중은 공간적인 하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개 성서에 있어서 땅은 타락된 악주권의 세계를 의미하고, 하늘은 죄가 없는 선 주권의 세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은 땅에도 아니 계시는 곳이 없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태복음 6장 9절라고 하셨고, 예수님은 땅에서 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요한복음 3장 13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사탄주권을 물리치시고, 지상천국을 복귀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선 주권의 세계에서 성도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5)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짐(마태복음 24장 29절)

창세기 37장 9절 이하를 보면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번째인 ‘요셉’ 이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에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요셉’이 커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 과연 이 꿈대로 그 부모와 형제들이 가서 엎드려 절을 하였다. 이 성경 말씀을 보면 해와 달은 부모를 상징했고, 별들은 자녀들을 상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독론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예수와 성신은 ‘아담’과 ‘해와’대신 인류를 중생해 주실 참부모로 오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해와 달은 예수와 성신을 상징하고, 별들은 자녀된 성도들을 상징한 것이다. 성서에서 예수님을 참 빛으로 비유한 것은(요한복음 1장 9절), 그가 ‘말씀’으로 육신을 이루신 분으로 오셔서(요한복음 1장 14절) 진리의 빛을 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말하는 햇빛은 예수님이 주신 말씀의 빛을 이름이며, 달빛은 진리의 신으로 오신 성신(요한복음 16장 13절)의 빛을 이름이다. 그러므로 해와 달이 빛을 잃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성신에 의한 신약의 말씀이 빛을 잃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신약의 ‘말씀’이 빛을 잃게 될 것인가? 마치 예수님과 성신이 어셔서 구약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신약의 말씀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말씀이 빛을 잃게 되었던 것과 같이,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신약의 말씀을 이루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기 위한(요한계시록 21장 1절{{ 요한계시록 21장 1절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새 말씀을 주시게 되면(본장 제 5절 1 참조), 초림 때에 주셨던 신약의 말씀은 그 빛을 잃게 될 것이다. 여기에 ‘말씀’이 그 빛을 잃는다는 것은 새 시대가 옴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의 사명기간이 지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별들이 떨어진다는 것은 말세에 있어서의 성도들이 모두 실족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시아’의 강림은 열망해 오던 유대교 지도자들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반대하다가 전부 떨어진 것 같이, 예수님의 재림을 열망하고 있는 기독교인들도 그 날에 실족하게 됨으로써, 그와 같이 떨어지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후편 제6장 제2절 2 참조).

누가복음 18장 8절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으나”하신 말씀이나, 마태복음 7장 23절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가 잘 믿는 성도들을 보시고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책망하시면서, “떠나가라”고 배척하게 될 것으로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와 같이 끝날 의 성도들이 불신으로 실족하게 될 것을 아시고 경고하신 것이었다.

제4절 말세와 현세

예수님께서 장차 있을 베드로의 죽음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에, 이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요한은 어떻게 될 것인 가고 질문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가 무슨 상관이냐”(요한복음 21장 18 – 22절)고 대답하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들은 사도들은 모두 ‘요한’의 생전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마태복음 10장 23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의 모든 동리를 다 다니지 못하여 인자가 오리라”고하셨고, 마태복음 16장 28절에는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말씀들에 의하여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했거니와,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성도들은 저마다 자기 당대에 예수님이 오실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말세라는 절박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말세에 대한 근본 뜻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복귀섭리의 목적으로 세우고 이루어 나오시던 3대 축복이 복귀되어 가는 현상으로 보아, 현세가 바로 말세임을 입증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마태복음 24장 32절)라고 하셨다.

1. 제1축복 복귀의 현상

이미 창조원리에서 논술한 바,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약속하셨던 제1축복은 바로 그들이 개성을 완성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타락인간을 개성을 완성한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해 나오신 하나님의 섭리가 그 최종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은, 아래와 같은 여러 현상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첫째로 타락인간의 심령이 복귀되어 가는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인간이 완성되면 하나님과 완전히 심정적인 일체를 이루어, 서로 교통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함은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아담과 해와도 불완전한 상태이기는 하였지만, 하나님과 일문일답하던 단계에서 타락되어, 그의 후손은 하나님을 모르는 데까지 떨어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타락된 인간이 복귀섭리의 시대적인 혜택을 받게 됨에 따라 점차 그 심령이 복귀됨으로써, 말세에 이르러서는 사도행전 2장 17절에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 이들은 꿈을 꾸리라”고하신 말씀대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영통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세에 이르러서는 영통하는 성도들이 비 온 뒤의 죽순 같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현세는 말세이기 때문에 인간이 개성을 완성하여, 하나님의 제1축복을 복귀할 수 있는 시대에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타락인간이 본심의 자유를 복귀해 가고 있는 역사적인 귀추가 더욱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사탄의 주관 권에 들어, 본심의 자유가 구속을 받게 됨으로써,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현세에 이르러서는 육신의 생명을 버리고라도, 본심의 자유를 찾으려는 심정이 고조되고 있으니, 이것은 말세가 되어 개성을 완성함으로써, 타락인간이 사탄에게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제1축복을 복귀하여, 하나님 앞으로 자유로 나아갈 수 있는 시대에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타락인간의 창조본연의 가치 성이 복귀되어 가는 현상으로 보아 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알 수있다. 인간의 창조본연의 가치를 횡적으로 보면 누구나 동등하기 때문에, 그 가치가 그다지 귀중한 것 같이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을 중심하고 종적으로 보면, 각 개성은 가장 존귀한 천주 적인 가치를 제각기 띠고 있는 것이다(전편 제7장 제1절).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이러한 가치를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현세에 이르러 민주주의사상이 고조됨에 따라 인간이 노예 해방, 흑인 해방, 약소민족 해방 등을 주장하며, 인권옹호와 남녀평등과 만민평등을 부르짖음으로써, 창조본연의 개성의 가치를 최고도로 추구하는 데 이르렀으니, 이것은 바로 말세가 다 되어 타락 인간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제1축복을 복귀할 수 있는 시대에로 들어가고 있음을 실증하는 것이다.

넷째로 타락인간의 본성의 사람이 복귀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완성한 세계는 완성한 사람 하나 모양의 세계로서, 그 세계의 인간은 모두 하나님과 종적으로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인간 상호간에 있어서도 횡적으로 일체를 이루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종횡으로 얽히어 한 몸같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종적인 사랑이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의 횡적인 사랑도 따라서 끊어지게 되어, 인류역사는 투쟁으로써 엮어져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현세에 이르러서는 박애주의 사상이 고조되면서 인간이 점점 그 본성애를 찾아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세는 하나님의 제1축복을 복귀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개성을 완성할 수 있는 말세에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제2축복 복귀의 현상

하나님의 제2축복은 아담과 해와가 참 부모로 완성되어, 선의 자녀를 번식함으로써 선 주권의 가정과 사회와 세계를 이루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는 타락되어, 악주권에 구속된 세계를 이루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편으로 종교를 세워 역사 하심으로써, 내적인 사탄 분립에 의한 심령복귀의 섭리를 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투쟁과 전쟁으로 외적인 사탄 분립을 하심으로써, 내 외 양면에 걸친 주권 복귀의 섭리를 해 내려 오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인류역사는 내 외 양면의 사탄 분립에 의한 복귀섭리로써, 장차 참 부모 되신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자녀를 찾아 하나님의 제2축복을 복귀해 온 것이므로, 종교를 중심한 문화권의 발전 사와 국가흥망사에 의해 나타난 내 외 양면에 걸친 하나님의 주권 복귀의 현상으로 보아, 현세가 바로 말세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우리는 문화권 발전사가 어떻게 흘러 내려와서, 현세를 말세에로 이끌어 가고 있는가를 알아보자.

문화권 발전사에 관한 문제는 이미 여려 차례 논술한 바이지만, 하나님은 타락인간에게 성현들을 보내시어, 선을 지향하는 인간의 본심을 따라 종교를 세우게 하심으로써, 그 종교를 중심한 문화권을 일으키셨다. 그러므로 역사상에는 많은 문화권이 일어났던 것이었으나,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이것들은 서로 융합 또는 흡수되어, 현세에 이르러는 기독교를 중심한 하나의 세계적인 문화권을 형성해 가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추세는 기독교의 중심인 예수님을 중심하고 모든 민족이 같은 형제의 입장에 서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제2축복이 복귀되어간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은, 전 인류의 참 부모를 찾아 세워 가지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중생하여 선의 자녀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본연의 대가족의 세계를 복귀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 기독교가 복귀섭리의 목적을 완성할 중심종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세에 이르러는 세계가 기독교를 중심하고 하나의 문화권으로 형성되어, 인류의 참 부모 되신 예수와 성신(전편 제7장 참조)을 중심하고 모든 인간이 선의 자녀의 입장에 서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제2축복 복귀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우리는 현세가 바로 말세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국가흥망사는 어떻게 주권복귀의 목적을 향하여 흘러와서, 현세를 말세로 이끌어 가고 있는가를 알아보자.

투쟁이나 전쟁을 단순히 어떠한 이해관계나 이념의 상충에서 빚어지는 결과라고 보는 것은, 하나님의 근본섭리를 모르는 데서 일어나는 잘못이다. 인류역사는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탄을 중심한 악주권으로 출발하여 죄악의 역사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남아 있는 한, 그 역사의 목적도 어디까지나 사탄을 분립하여 하나님의 선주권을 복귀하는 데 있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악주권의 세계에 전쟁도 분열도 없다면, 그 세계는 그대로 영속할 것이요, 따라서 선주권은 영원히 복귀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타락인간에게 성현들을 보내시어, 선을 세우고 종교를 일으키심으로써, 보다 선한 주권으로 하여금 보다 악한 주권을 멸하게 하시면서, 점차적으로 하늘편 주권을 복귀하시는 섭리를 해 오신 것이다. 따라서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르기 위하여는 투쟁과 전쟁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후편에서 더욱 상세히 논하겠거니와 인류역사는 탕감복귀의 섭리노정을 밟아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국한된 시간권내에서만 보면, 악이 왕성한 때도 없지 않았으나, 결국 그것은 패망하여 보다 선한 판도 내에 흡수되곤 하였다. 그러므로 전쟁으로 인한 국가의 흥망성쇠는, 선주권을 복귀하기 위한 섭리노정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 가나안 7족을 멸하셨던 것이고, 사울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아멜렉족과 그에 속한 짐승들을 전멸시키지 않았다가 엄벌을 받았던 것이다(사무엘상 15장 18 – 23절). 하나님은 이와 같이 직접 이민족들을 멸할 것을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선민이었던 북조 이스라엘도 악으로 돌아갈 때, 아낌없이 그들을 앗시리아에 내주시어 멸망케 하셨던 것이다(열왕기하 17장 23절). 하나님이 이와 같이하셨던 것은, 오직 악주권을 멸하시고 선주권을 복귀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같은 하늘편 안에서의 개인적인 투쟁은 선주권 자체를 파괴하는 결과가 되므로 악이 되지만, 선주권이 악주권을 멸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므로 이것은 선이 된다.

이와 같이 사탄 분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는, 점차적으로 땅과 재물을 세계적으로 빼앗아 하늘편 주권으로 복귀하는 데 이르렀고, 인간에 있어서도 개인으로부터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로 하늘편 기대를 넓혀, 오늘날에는 이것을 세계쩍으로 복귀하는 데 이르렀다. 이렇듯 사탄분립을 위한 섭리가 씨족주의시대에서 출발하여, 봉건주의시대와 군주주의시대를 거치어 민주주의시대로 들어오게 된 오늘날에 와서는, 이 인간세계를 하늘편 주권을 세우는 민주주의세계와, 사탄편 주권을 세우는 공산주의세계의 두 세계로 분립하여 놓았다.

이와 같이 사탄을 중심한 악주권으로써 출발한 인류 역사는, 한편으로 종교와 철학과 윤리에 의하여 선을 지향하는 인간의 창조본성이 환기됨에 따라, 점차 악주권에서 선주권을 위한 세력이 분립되어, 마침내 세계적으로 대립되는 두 주권을 형성하는데 이른 것이다. 그런데 목적이 상반되는 이 두 주권이 결코 공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인류역사의 종말에 이르르면, 이것들은 반드시 한 점에서 교차되어, 이념을 중심하고 내적으로 상충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군사력을 중심하고 외적으로 전쟁을 하여, 결국 사탄주권은 영원히 파멸되고, 하늘편 주권만이 영원한 하나님의 단일주권으로서 복귀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세는 선주권을 지향하는 하늘편 세계와 사탄을 중심한 악주권의 세계가 대결하여, 서로 교차되고 있는 때이므로 또한 말세인 것이다.

이와 같이 악주권에서 선주권을 분립하여 나온 인류역사는, 마치 흐르는 흙물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흙은 가라앉고 물은 위에 뜨게 되어, 나중에는 흙과 물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과 같이,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악주권은 점차 쇠망의 길로 내려오고, 선주권은 융흥의 길로 올라가게 되어,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 이 두 주권은 얼마동안 교차되었다가, 결국 전자는 영원히 멸망하고 후자는 하나님의 주권으로서 영원히 남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 악 두 주권의 역사노정이 교차되는 때가 말세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때는 아담과 해와가 타락된 장성기 완성급의 시기를 탕감복귀하는 때이므로, 마치 에덴동산의 인간시조가 어디에다 중심을 두어야 할지 모르고 혼돈되었던 것과 같이 모든 인간들도 사상의 혼돈을 일으키어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복귀섭리노정에 있어 이와 같이 말세가 되어, 선 악의 두 주권이 교차되었던 때는 여러 차례 있었다.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노아 때나 예수님 때도 말세여서 이 두 주권은 서로 교차되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마다 인간이 그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여 악주권을 멸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주권분립의 섭리를 다시 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 재림기에 있어 다시 한번 두 주권의 교차가 있게 되는 것이다. 복귀섭리노정은 이렇듯 주기적으로 비슷한 나선상을 반복하면서 원형과정을 거쳐 창조목적을 지향하여 내려왔기 때문에, 역사상에는 필연적으로 동시성의 시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후편 제3장 제1절 참조).

3. 제3축복 복귀의 현상

하나님의 제3축복은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어, 피조세계에 대한 주관성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피조세계에 대한 인간의 주관성은 내 외 양면의 주관성이 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이 양면의 주관성을 상실하였던 것인데, 현세에 이르러 이것이 복귀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세는 말세라는 것을 알수 있는 것이다.

내적 주관성이라는 것은 심정적 주관성을 의미한다. 인간이 개성을 완성하면 하나님과 심정적인 일체를 이루어 하나님의 심정을 그대로 체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완성됨으로써,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과 동일한 심정을 가지고, 피조세계에 대하여 사랑을 주고 그로부터 미를 돌려 받게 될 때, 인간은 피조세계에 대한 심정적인 주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되어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심정으로써 피조세계를 대할 수 없게 되었었다. 그러나 종교, 철학, 윤리 등에 의한 하나님의 복귀섭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타락인간의 심령이 점차로 밝아지게 되어, 현세에 이르러는 피조세계에 대한 심정적인 주관자의 자격을 복귀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외적 주관성은 과학에 의한 주관성을 의미한다. 만일 인간이 완성되어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과 동일한 심정을 가지고 피조세계를 대하여 내적 주관을 할 수 있었다면, 인간의 영감은 고차적으로 발달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과학의 발달도 극히 단시일에 최고도에 달하게 되었을 것이었다. 인간은 그렇게 됨으로써 피조물에 대한 외적인 주관을 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따라서 인간은 일찍이 천체를 비롯한 자연계 전체를 완전히 정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학의 발달에 따르는 경제발전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안락한 생활환경을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심령이 어두워짐으로써, 피조물에 대한 내적인 주관성을 상실하게 되어, 동물과 같이 영감이 둔한 미개인으로 연락되었기 때문에, 피조물에 대한 외적인 주관성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의하여 심령이 밝아짐에 따라, 피조물에 대한 내적인 주관성도 복귀되어 왔고, 그에 따라 피조물에 대한 외적인 주관성도 점차로 복귀되어 왔기 때문에, 현세에 이르러서는 과학의 발달도 최고도에 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과학의 발달에 따르는 경제발전으로 말미암아, 현대인은 극도로 안락한 생활환경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같이 타락인간이 피조세계에 대한 주관성을 복귀함에 따라, 하나님의 제3축복이 복귀되어 가는 현상을 볼 때, 우리는 현세가 말세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여러 번 보아 온 바와 같이, 문화권의 발전도 하나의 종교를 중심하고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해 가고있고, 국가형태도 하나의 세계적인 주권기구를 지향하여, 국제연맹에서 국제 연합으로,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는 세계정부를 모색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경제발전을 놓고 보더라도 세계는 하나의 공동시장을 이루어 가는 추세에 있으며, 극도로 발달된 교통기관과 통신기관은 시간과 공간을 단축시켜서 인간으로 하여금 지구를 하나의 정원과 같이 거닐고 또 교통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인류는 사해동포의 형제애를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가정은 부모가 있음으로써만 이루어지며, 또 거기에서만 진정한 형제애는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인류의 부모 되신 예수님만 재림하시면 전 인류는 하나의 정원에서 하나의 대가족을 이루어 가지고 단란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보더라도 현세는 말세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흘러온 역사가 인류에게 주어야 할 최후의 선물이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은 목적 없이한 정원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낯선 이 나그네들을, 한 부모를 중심한 한 식구로 묶어 줄 수 있는 천주 적인 이념인 것이다.

제5절 말세와 새 말씀과 우리의 자세

1. 말세와 새 진리

타락인간은 종교에 의하여, 신령과 진리로써(요한복음 4장 23절) 그의 심령과 지능을 깨우쳐서 그의 내적인 무지를 타개하여 나간다. 그런데 진리에 있어서도 내적인 무지를 타개하는 종교에 의한 내적인 진리와 외적인 무지를 타개하는 과학에 의한 외적인 진리의 두 면이 있다. 따라서 지능에도 내적인 진리에 의하여 깨우쳐지는 내적인 지능과 외적인 진리에 의하여 깨우쳐지는 외적인 지능의 두 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인 지능은 내적인 진리를 찾아 종교를 세워 나아가고, 외적인 지능은 외적인 진리를 찾아서 과학을 세워 나아가는 것이다.

신령은 무형세계에 관한 사실들이 영적 오관에 의하여 영인체에 영적으로 인식되었다가, 이것이 다시 육적 오관에 공명되어 생리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며, 진리는 유형세계로부터 직접 인간의 생리적인 감각기관에 의하여 인식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도 영 육 양면의 과정을 거쳐서 오게 된다. 인간은 영인체와 육신이 합해야만 완전한 인간이 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적 과정에 의한 신령과 육적 과정에 의한 진리가 완전히 조화되어 심령과 지능이 아울러 깨우쳐짐으로써, 이 두 과정을 통해 온 양면의 인식이 완전히 일치될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과 전 피조세계에 관하여 완전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무지에 빠진 인간으로 하여금, 신령과 진리에 의하여 심령과 지능을 아울러 깨우치게 함으로써,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하여 나아가는 섭리를 하신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이러한 복귀섭리의 시대적인 혜택을 받아서, 그의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높아지게 되는 것이므로, 그를 깨우치기 위한 신령과 진리도 또한 점차로 그 정도를 높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리는 유일하고 영원불변하지만, 무지한 상태로부터 점차 복귀되어 나아가는 인간에게,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범위나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나 방법은 시대를 따라 달리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38~139

예를 들면, 인간이 아직도 몽매하여 진리를 직접 받을 수 없었던 구약 시대에는, 진리 대신으로 제물을 드리게 하셨고, 인간의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높아짐에 따라 ‘모세’때는 율법을, 예수님 때는 복음을 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진리라고 하시지 않고, 그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요한복음 14장 6절). 왜냐 하면 그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진리 되신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어서 그 말씀을 받는 대상에 따라서 그 범위와 정도와 방법을 달리하시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의 문자는 진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요 진리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 입각해 볼 때, 신약성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있어,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대단히 저급하였을 때의 인간들로 하여금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해 주셨던 하나의 과정 적인 교과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의 사람들을 깨우치기에 알맞도록 주셨던, 한정된 범위 내에서의 비유 또는 상징적인 표현방법 그대로를 가지고, 현대 과학문명인들의 진리에 대한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킨다는 것은 결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지성인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는, 보다 고차적인 내용과 과학적인 표현방법에 의한 것이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을 우리는 새 진리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새 진리는 이미 총서에서 말한 바, 인간의 내 외 양면의 무지를 타개하기 위하여,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통일된 과제로 완전히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는 안된다.

새 진리가 나와 야 할 이유를 또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성서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그 진리를 가르쳐주는 하나의 교과서인 것이다. 그런데 이 교과서에는 그 진리의 중요한 부분이 거의 상징과 비유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에는 사람에 따라 서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차이로 말미암아 많은 교파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파 분열의 제1원인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성서 자체에 있기 때문에, 그 분열과 싸움은 계속 확대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진리가 나와서 상징과 비유로 되어 있는 성경의 근본내용을 누구나 공인할 수 있도록 해명하지 않는 한, 교파분열과 그 싸움의 길은 막을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기독교의 통일에 의한 복귀섭리의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요한복음 16장 25절)는 말씀으로써, 끝날에 이르면 다시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이다. 140

예수님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한복음 3장 12절)고하신 말씀대로,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하실 말씀을 못다 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까지도”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한복음 16장 12절)고하심으로써 속에 있는 말씀을 다하시지 못하는 서러운 심정을 토로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못다 하시고 돌아가셨던 그 말씀은 영원히 비밀로 남아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 16장 13절)고 계속하여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 말씀은 반드시 성령에 의하여 새로운 진리로써 가르쳐 주시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요한계시록 5장 1절)고도 기록되어 있는 바로 그 책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신 그 말씀이 인봉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계속하여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보면,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 능히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여 요한이 애곡할 때에,“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요한계시록 5정 3 – 5절)고 말씀하셨다. 여기의 다윗의 뿌리에서 탄생한 사자는 바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인류 앞에 오랫동안 일곱 인으로 봉하여 비밀로 남겨 두셨던 그 말씀의 인봉을 떼시어, 성도들에게 새로운 진리의 말씀으로 주실 때가 와야 할 것이기 때문에,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요한계시록 10장 11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기에 또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사도행전 2장 17 – 18절)라고도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모로 보아서 말세에는 반드시 새 진리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2. 말세에 처한 우리들이 취할 자세

복귀섭리역사의 흐름을 보면, 낡은 것이 끝나려 할 때 새로운 것은 시작된다. 따라서 낡은 것이 끝나는 점이 바로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낡은 역사의 종말기는 바로 새 역사의 시작기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기는, 같은 점에서 출발하여 각각 그 목적을 달리하여 가지고, 세계적인 결실을 하게 된 선과 악의 두 주권이 서로 교차되는 시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처한 인간들은, 내적으로는 이념과 사상의 결핍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와 혼돈 속에 빠지게 되며, 외적으로는 무기로 인한 알력과 투쟁 속에서 떨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말세에는 나라가 나라를 치고, 민족과 민족이 상쟁하며, 가족들이 서로 결투를 하리라(마태복음 24장 4 – 9절)는 성서의 기록대로 온갖 비참한 현상이 실제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말세에 있어서 이와 같은 참상이 일어나는 것은 악주권을 청산하고 선주권을 세우기 위한 필연적인 현상이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참상 속에서 새 시대를 이룩하기 위한 선주권의 중심을 반드시 세우시는 것이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예수님 같은 분들은 모두 그러한 새 시대의 중심으로 세워졌던 분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사적인 전환기에 있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새 역사의 동참자가 되기 위하여는, 하나님이 세우신 새 역사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 시대의 섭리는 낡은 시대를 완전히 청산한 터 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낡은 시대의 종말기의 환경 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는 것이므로, 그 시대에 대하여는 상충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섭리는 낡은 시대의 인습에 젖은 사람에게는 좀처럼 납득되어지지 않는다. 새 시대의 섭리를 담당하고 나왔던 성현들이, 모두 그 시대의 희생자가 되어 버렸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 실 예로서 아직도 구약시대의 종말기였을 때에, 신약시대의 새로운 섭리의 중심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구약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이단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셨었기 때문에, 종내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살해당하고 마셨다. 예수님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누가복음 5장 38절)고 말씀하셨던 이유도 또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다시 신약시대의 종말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새로운 섭리의 중심으로 오셔서, 새 시대의 건설을 위한(요한계시록 21장 1 – 7절) 새 진리를 주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초림 때에 유대인들로부터 바알세불이 접한 사람으로 몰렸듯이(마태복음 12장 24절), 재림 때도 틀림없이 기독교 신도들에게 몰림을 당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장차 재림하시면 자기가 많은 고난을 받으며, 그 세대에 버린 바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던 것이다(누가복음 17장 25절). 그러므로 역사의 전환기에 있어서, 그대로 낡은 시대의 환경에 집착되어 안도하려는 사람들은, 낡은 시대와 더불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타락된 인간은 신령에 대한 감성이 극히 둔하기 때문에, 대개 진리 면에 치중하여 복귀섭리 노정을 따라 나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들은 흔히 낡은 시대의 진리 관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복귀섭리가 새로운 섭리의 시대에로 전환하고 있어도, 그들은 이 새 시대의 섭리에 쉽게 감응하여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집착되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따라 신약시대의 섭리에 호응할 수 없었던 역사적인 사실은 이것을 입증하는 좋은 예라 하겠다.

그러나 기도로써 신령한 것을 감득할수 있는 성도들은, 새 시대의 섭리를 심령 적으로 알게 되므로, 낡은 시대의 진리 면에서는 상충적인 입장에 서면서도 신령을 따라 새 시대의 섭리에 호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 중에는, 구약성서에 집착된 인물은 하나도 없었고 오직 마음에 느껴지는 신령을 따라간 사람들 뿐이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말세에 있어서 극심한 심령 적인 초조감을 면할 수 없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막연하나마 신령을 감득하여서, 마음으로는 새 시대의 섭리를 따르려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이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새 진리에 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령 적으로 이러한 상태에 처한 신도들이, 그들을 새 시대의 섭리에로 이끌어주는 새 진리를 듣기만 하면, 신령과 진리가 동시에 그들의 심령과 지능을 깨우쳐서, 새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적인 요구를 완전히 인식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그에 호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에 처한 현세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를 통하여 신령한 것을 감득하도록 힘써야 한다.

다음으로는 인습적인 관념에 집착되지 알고 우리의 몸을 신령에 호응하게 함으로써, 새 시대의 섭리에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새 진리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찾아진 그 진리가 완전히 자기의 몸에서 신령과 하나되어, 진정한 천적인 기쁨이 심령의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게 하여 주는가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끝날 의 성도들은 참된 구원의 길을 찾아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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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January 20,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