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비둘기와 양과 암소를 한 제단에 올려놓고 제사를 드리되 각각을 쪼개어 드리도록 명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양과 암소는 쪼개었으되 비둘기는 쪼개지 않은 채 제사를 드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그러면 왜 제물을 쪼개어 제사를 드려야만 했으며 제물 쪼개지 않은 것이 죄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제3절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함의 타락행위로 말미암아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창조목적을 완성하시려는 ‘뜻’ 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시는 것이므로, 노아가 하늘을 대하여 충성했던 그 심정의 터전 위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그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를 다시 하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노아 가정이 이루려다 못 이루었던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여, 그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이하여야만 하였다. 따라서 아브라함도 먼저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고, 그 기대 위에서 실체기대를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Ⅰ. 믿음의 기대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은 바로 아브라함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노아를 중심하고 이루려 하셨던 ‘뜻’을 계승하여 이루기 위한 중심인물로 세워졌던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노아의 노정을 위하여 세워졌다가 함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내 주게 되었던 모든 조건들을 탕감복귀한 입장에 서지 않으면, 노아를 중심한 ‘뜻’을 이어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노아가 첫째로 사탄에게 내주었던 조건은,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0대와 심판 40일기간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10대와 함께, 그 10대가 각각 심판 40수를 탕감복귀한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1대를 40일기간으로써는 탕감복귀할 수 없었기 때문에, 후일 모세노정에 있어서 정탐 40일의 실수를 광야 표류 40년기간으로써 탕감복귀한 것과 같이(민수기 14장 34절), 여기에서도 각 대가 심판 40일의 실수를 40년기간으로써 탕감복귀하는 통산년수를 세우게 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노아로부터 10대에 걸친 400년 탕감기간을 경과한 후에야 비로소 노아 대신으로 아브라함을 세우셨다. 이와같이,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1600년 간에 10대를 복귀하였던 시대에서 400년 간에 10대를 복귀하는 시대로 넘어왔기 때문에 노아 이후 인간의 수명은 갑자기 짧아지게 되었다.
노아가 둘째로 사탄에게 내주었던 조건은 믿음의 조상의 입장과 아벨 대신이었던 함의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과 함의 입장을 탕감복귀하지 않고는 노아의 입장에 설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노아 대신 믿음의 조상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는 , 노아가 믿음과 충성으로 방주를 지었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도 믿음과 충성으로‘상징헌제’를 드려야만 했었다. 한편 또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아벨의 대신이었던 함(그들은 모두 둘째 아들로서 실체헌제의 중심이었다)을 사탄에게 내주셨으므로, 탕감복귀원칙에 의하여 하나님도 그 대신으로 사탄이 가장 사랑하는 입장에 있는 존재를 빼앗아 오셔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분에 하나님은 우상장사인 데라로부터 그 아들 아브라함을 이끌어 내셨던 것이다(수 24:2-3). 287
아브라함은 노아의 대신이요. 따라서 아담의 대신이기 때문에 복귀한 아담형의 인물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과 노아에게 축복하셨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에게도 자녀를 번식하여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라고 축복하셨던 것이다(창12:2). 아브라함은 이러한 축복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하란에서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아내 사라와 조카 롯 그리고 거기에서 취한 모든 재물과 삶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갔었다(창12:4-5).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노정으로써, 장차 야곱과 모세가 사탄세계인 하란과 애급에서 각각 그 처자를 데리고 재물을 취하여, 그 어려운 환경을 박차고 떠나 가나안으로 복귀해야 할 전형노정으로 삼게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노정은 또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사탄세계의 모든 인간과 만물세계를 하나님의 세계에로 복귀해야 할 전형노정을 예시한 것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후편 제2장 제1절 Ⅱ 참조).
(1)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비둘기와 양과 암소로써 제사를 드릴것을 명하셨던 것이니, 이것들은 바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들이었던 것이다(창 15:9). 따라서 마치 노아가 ‘상징헌제’로서 방주를 지어 바치려하였을 때 그 헌제를 위한 믿음을 세웠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도 이 ‘상징헌제’를 하기 위하여는 그것을 위한 믿음을 세워야만 했었다. 성서에는 노아가 어떠한 방법으로 그 믿음을 세웠는가 하는 것은 명기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창세기 6장 9절에 노아가 당세의 의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방주를 지으라시는 명령을 받기에 합당한 의인이 되기까지에는 필시 어떠한 믿음을 세웠음에 틀림없다. 기실 복귀섭리는 이와 같이 믿음에서 믿음을 세워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다(롬 1:17).
그러면 아브라함은 ‘상징헌제’를 하기 위하여 어떠한 믿음을 세웠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아브라함은 제2 인간 조상 노아의 입장을 복귀해야 했었다. 따라서 그는 또 아담의 입장에도 서야 했기 때문에, 그는 ‘상징헌제’를 하기전에 아담가정의 입장을 복귀하는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먼저 세워야 하였던 것이다.
창세기 12장 10절 이하의 성구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기근으로 인하여 애급으로 내려갔던 일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애급 왕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고자 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그와 부부관계하고 하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하여 미리 짠 바 계책대로 자기의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아브라함은 그의 처 사라를 남매의 입장에서 바로의 아내로 빼앗겼다가 하나님이 바로를 징계하시어 다시 그 아내를 찾아오는 동시에, 데리고 갔던 조카 롯과 함께 많은 재물을 취해가지고 나왔었다. 아브라함은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서, 아담가정의 입장을 탕감복귀하는 상징적인 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이러한 섭리노정을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289
아담과 해와가 미완성기에서 아직 남매와 같은 입장에 있었을 때에 천사장이 해와를 빼앗아 감으로 인하여, 그의 자녀들과 만물세계까지 사탄의 주관하에 속하게 되었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조건을 세우려면,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남매와 같은 입장에서 처 사라를 사탄의 실체인 바로에게 빼았기었다가 그의 처의 입장에서 다시 그녀를 찾아옴과 동시에, 전인류를 상징하는 롯과 만물세계를 상징하는 재물을 찾아오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창 14:16). 아브라함의 이러한 노정은 후일에 예수님이 오셔서 걸어야 할 전형노정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와 같이 탕감조건을 세운 후에야 비로소 비둘기와 양과 암소로써 ‘상징헌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상징헌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하여는, 원래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려 하셨던 노아와 그 가정의 입장을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담과 그 가정의 입장에도 서야했었기 때문에, 아담가정에서 가인 아벨의 헌제를 중심하고 복귀하려 했던 모든 것을 탕감복귀할 수 있는 상징적인 조건물을 바쳐야 했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또 노아가정이 방주를 중심하고 복귀하려 했던 모든 것을 탕감복귀할수 있는 상징적인 조건물을 하나님 앞에 합당한 제물로 바쳐야 했었다. 이러한 상징적인 조건물로 바친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상징제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상징제물로 바쳤던 비둘기와 양과 암소는 과연 무엇을 상징하였던가?
이 세 가지의 상징제물은 3단계의 성장과정을 통하여 완성되는 천주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즉 그중의 비둘기는 소생을 상징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섭리 완성자, 곧 소생섭리 완성자로 오셨었다. 즉 예수님은 비둘기로 표시된 소생섭리 완성자로 오셨기 때문에, 그에 대한 표징으로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신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 위에 임하셨던 것이다(마3:16). 한편 또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를 복귀하려고 오신 분으로서 먼저 사탄이 침범했던 그 비둘기를 복귀한 입장에 서야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비둘길써 그가 소생 구약섭리 완성자로 오셨음을 보여 주셨던 것이다. 290
다음으로 양은 장성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를 복귀하려고 오신 분으로서, 비둘기로서 표시된 모든 것을 복귀한 구약섭리의 기대 위에서 양으로서 표시된 모든 것을 복귀해야 할 장성 신약섭리의 출발자이기도 하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 의하여 비둘기로 표시된 소생섭리의 완성자라느 증거를 받으신 후, 어느 날 세례 요한은 또 예수님이 걸어오시는 모습을 보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이 장성 사명 출발자이심을 증거하였던 것이다. 291
다음으로 암소는 완성을 상징하였다. 사사기 14장 18절을 보면, 삼손이 수수께끼의 문제를 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로 하여금 삼손을 꼬여 그 내용을 탐지해 내게 함으로써 그것을 푼 일이 있었는데, 그때 삼손은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아니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삼손은 아내를 암소로 비유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전인류의 신랑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가 재림하실때까지의 성도들은 오시는 신랑 앞에 신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부 된 성도들이 다시 오시는 신랑 된 예수님과 어린양잔치를 치른 후에는 신부가 아니고 아내가 되어 남편 된 예수님과 더불어 천국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재림 이후의 완성성약시대는 아내의 시대요, 따라서 암소의 시대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암소는 곧 완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많은 영통인들이 이때가 소의 시대라고 계시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3제물은 또 무엇을 탕감복귀하는 것인가? 아브라함은 그의 ‘상징헌제’로써, 일찍이 아담과 노아의 각 가정을 중심한 섭리에서 그들이 ‘상징헌제’로써 탕감복귀하여다가 사탄에게 내주었던 모든 것을 재탕감복귀하는 동시에, 또 그들이 ‘실체헌제’로써 탕감복귀하려다가 실패하여 사탄에게 내주었던 모든 것을 재탕감복귀할 수 있는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였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상징헌제’는 아담으로부터 노아 아브라함, 이렇게 3대에 걸친 종적인 섭리의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그 3제물로써 일시에 횡적으로 복귀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소생·장성·완성의 3단계를 상징하는 비둘기와 양과 암소를 한 제단에 버여 놓고 헌제한 것은, 마치 아담의 당대에서 3단계의 성장기간을 완성하려 했던 것과 같이 아담의 입장인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소생 아담, 장성 노아, 완성 아브라함의 , 뜻으로 본 3대에 걸쳐서 탕감복귀하시려던 종적인 섭리를 일시에 횡적으로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헌제는 사탄이 침범하였던 3수로 표시된 모든 조건들을 일시에 탕감복귀 함으로써, 전복귀섭리를 단번에 이루시려는 뜻을 상징적으로 표시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 ‘상징헌제’를 어떻게 드렸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겠다. 292
창세기 15장 10절 내지 13절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다른 제물은 모두 둘로 쪼개서 제단의 좌우에 놓았으나 비둘기만은 쪼개지 않고 그대로 놓았기 때문에, 솔개가 그 고기 위에 내려왔으므로 아브라함이 이것을 쫓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그 날 해질 때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창15:13)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쪼개야 할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기 때문에 그 위에 솔개가 내렸었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 들어가서 400년 간을 고역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이 어찌하여 죄가 되었는가? 이문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해결의 문제로서 남아져 왔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원리를 통하여서만 명확히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면 제물을 쪼개야 하는 이유는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구원섭리의 목적은 선과 악을 분립하여 악을 멸하고 선을 세움으로써 선주권을 복귀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아담 한 존재를 가인과 아벨로 분립한 후에 헌제해야 했던 것이나, 또 노아 때에 홍수로써 악을 치고 선을 분립했던 것 등의 목적은 모두 선주권을 복귀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제물을 쪼개 바치게 함으로써, 아담이나 노아로써 이루지 못하였던 선악 분립의 상징역사를 이루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물을 쪼개는 것은, 첫째로 아담가정에 있어서 선악의 모체인 아담을 선과 악의 두 표시체로 분립하기 위하여 아벨과 가인으로 갈라 세운 것과 같은 입장을 복귀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둘째로는 노아가 홍수 40일로써 선과 악을 갈라 세웠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함이었으며, 셋째로는 사탄 주관하에 있는 피조세계에서 선주권의 세계를 갈라 세우는 상징적인 조건을 세우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네째로는 사탄과의 혈연관계를 통하여 들어온 사망의 피를 뽑아 성별하는 조건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293
그러면 쪼개지 않은 것이 어찌하여 죄가 되는가? 쪼개지 않은 것은 첫째로 가인과 아벨을 분립하지 않은 입장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대할 수 있는 아벨적인 대상이 없었고,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에게 합당한 헌제가 되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가인 아벨의 헌제 실패는 탕감복귀되지 않았다. 둘째로 그것을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에 있어서의 홍수심판에서 선악을 분립하지 못하였던 상태 그대로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상대하여 섭리하실 수 있는 선의 대상이 없게 되어 홍수심판에서 실패한 입장으로 되돌아간 결과가 되었다. 셋째로 그것은 사탄 주관하에 있는 피조세계에서 하나님이 상대하실 수 있는 선주권의 세계를 분립하는 상징적인 조건을 세우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네째로 그것은 사망의 피를 뽑아 성별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상대하여 섭리하실 수 있는 성물이 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고 바침으로 인하여 그것은 사탄 것 그대로를 바친 것이 되어, 결국 그것은 사탄의 소유물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여 준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소생을 상징하는 제물인 비둘기가 사탄의 소유물로 남아지게 되었으므로, 소생의 기대위에 세워야 할 장성과 완성을 상징하는 양과 암소에게도 역시 사탄이 침범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상징제물은 모두 사탄에게 바친 결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이 범죄가 된 것이다. 294
그러면 다음에는 상징제물에 솔개가 내렸다는 것은 (창 15:11)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인간 시조가 타락한 이후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뜻 앞에는 반드시 사탄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즉 창세기 4장 7절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헌제를 할 때에도 사탄이 그들을 엿보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노아 때에도 심판 직후에 사탄이 노아가정에 침범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것을 까마귀로써 보여 주셨다(창 8:7).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상징헌제’를 할 때에도 그 제물에 침범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던 사탄은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을 보고 곧 그 제물에 침범하였었다.그리하여 성경은 이 사실을 솔개가 제물위에 내린 것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헌제’의 실수는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가? 아브라함의 ‘상징헌제’실수로 말미암아 그 ‘상징헌제’로써 탕감복귀하려던 모든 것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결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방인 애급에서 400년 간 고역을 하게 되었던 것이니,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던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노아 때에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내주셨던 10대와 40수를 동시에 탕감복귀하기 하시기 위하여 400년이란 사탄 분립기간을 세우시고, 그 분립기대 위에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상징헌제’를 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그 제물을 또 사탄에게 바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상징헌제’로써 아브람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한 탕감기간이었던 노아 이후의 400년 전도기간도 역시 사탄에게 내주시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수하기 전의 입장이며, 따라서 노아가 방주를 짓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입장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서는 이 400년이란 사탄분립기간을 다시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고역하는 400년 기간은, 노아나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출발하려 했었던 그 입장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여 모세를 그 터전위에 세우시기 위한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 고역기간은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로 인한 벌을 받는 기간인 동시에,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를 위하여 사탄 분립의 터를 닦는 기간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한 제단에 3제물을 동시에 드리는 ‘상징헌제’에 성공하심으로써 소생, 장성, 완성으로 표시된 모든 섭리를 동시에 이루려 하셨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논술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를 중심한 섭리는 다시 이삭을 거쳐 야곱까지 3대에 걸친 연장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상징헌제’실패는 노아의 방주를 중심한 ‘상징헌제’와 가인 아벨을 중심한 ‘상징헌제’등의 실패를 반복한 것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