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예정설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실제에 적지 않은 혼란을 일으켜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성서에는 인생의 영고성쇠와 행 불행은 물론 타락인간의 구원 여부와 국가의 흥망성쇠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되어지는 것으로 해석되는 성구가 많이 있다.
그 예를 들면 로마서 8장 29절 이하에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이를 부르시고, 부르신 이를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를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셨다. 또 로마서 9장 15절 이하에는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였으며, 로마서 9장 21절에는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로마서 9장 11절 이하에는, 하나님은 복중에서부터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시어, 장자된 에서는 차자 야곱을 섬기리라고 한 말씀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완전예정설을 세워줄 수 있는 성서적인 근거는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예정설을 부정할 수 있는 또 다른 성서적인 근거도 많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2장 17절에 인간조상의 타락을 막으시기 위하여 ‘따먹지 말라’고 권고하신 것을 보면, 인간의 타락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예정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치 않은 결과였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한편 또 창세기 6장 6절에는, 인간시조가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한탄하신 기록이 있는데,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타락되었다면, 하나님 자신의 예정대로 타락된 인간을 두시고 한탄하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 또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바로 멸망으로 예정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성구인 마태복음 7장 7절에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에게 만나게 하시며,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보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예정으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 좌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예정으로만 되어진다면, 무엇 때문에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실 필요가 있겠는가?
또 야고보서 5장 14절에 병중에 있는 형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는 것을 보면, 병이 나거나 낫거나 하게 되는 것도 역시 모두 하나님의 예정에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불가피한 운명으로 결정지어지는 것이라면, 인간이 애써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종래의 예정설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기도나 전도나 자선행위등 인간의 모든 노력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아무 도움도 될 수 없고,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자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라면 그것도 역시 절대적일 것이므로, 인간의 노력으로 변경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정설을 둘러싸고 찬 반 양론이 모두 세워질 수 있는 성서의 문자적인 근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교리의 논쟁은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가 원리로써는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 예정론에 대한 문제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정을 논술하기 위하여, 우리는 여기에서 ‘뜻’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창조목적을 이루지 못하셨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들을 놓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어디까지나 이 창조목적을 다시 찾아 이루시려는 데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뜻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은 이러한 뜻을 예정하시고, 그것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창조목적을 이루시려는 뜻을 세우셨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루지 못하셨던 그 뜻을 다시 이루시기 위하여 그것을 다시 예정하시고 복귀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이 뜻을 선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셔야 하며, 악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실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의 주체이시므로 창조목적도 선이요, 따라서 복귀섭리의 목적도 선이시어서 그 목적을 이루시려는 뜻도 선이 아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목적을 이루시는데 반대되거나 장애가 되는 것을 예정하실 수는 없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이나 타락인간에 대한 심판이나, 혹은 우주의 멸망 등을 예정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악의 결과도 하나님의 예정으로 되어지는 필연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은 선의 주체라고 할 수 없으며, 자신이 예정하신 대로되어진 악의 결과에 대하여 후회하셔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된 인간을 보시고 한탄하셨고(창세기 6장 6절), 또 불신으로 돌아간 사울 왕을 보시고 그를 택하셨던 자신의 일을 후회하셨던 것이니(사무엘상 15장 11절), 이것은 그것들이 모두 예정으로 되어진 결과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악의 결과는 모두 인간 자신이 사탄과 짝함으로써, 그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한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목적을 다시 이루시려는 뜻을 예정하심에 있어서 그것은 어느 정도로 예정하시고 이루시는 것인가?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절대자이시므로, 하나님의 창조목적도 역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뜻에 대한 예정 또한 절대적인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이사야 46장 11절). 이와 같이 뜻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기 때문에, 만일 이 뜻을 위하여 세워진 인물이 그것을 이루어 드리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은 그의 대신 다른 인물을 세워서라도 끝까지 이 뜻을 이루어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 예를 들면 아담을 중심하고 창조목적을 이루려 하셨던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 뜻에 대한 예정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후아담으로 보내시어, 그를 중심하고 그 뜻을 다시 이루시려 하셨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 뜻도 역시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전편 제4장 제1절 Ⅱ), 예수님은 재림하셔서 까지 이 뜻을 기필코 완수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이다(마태복음 16장 27절).
또 하나님은 아담가정에서, 가인과 아벨을 중심한 섭리로써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세우려 하셨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 대신 노아가정을 세우시어 이 뜻을 이루려 하셨던 것이다. 나아가 노아가정이 또 이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대신으로 아브라함을 세우시어 기필코 그 뜻을 이루셔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또 아벨로써 이루시지 못한 뜻을 그 대신 셋을 세우시어 이루려 하셨고(창세기 4장 25절), 또 모세로써 이루어지지 않은 뜻을 대신 여호수아를 택하여 이루려 하셨으며(여호수아 1장 5절), 가룟유다의 반역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던 뜻을, 그의 대신 맛디아를 택하시어 이루려 하셨던 것이다(사도행전 1장 25절).
창조원리에서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인간이 그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목적을 다시 찾아 이루시려는 복귀섭리의 뜻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관여할 수 없으나, 그 ‘뜻성사’에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책임분담이 가담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과 해와를 중심한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사실상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으로, 그들에게 맡겨진 책임분담을 그들 자신이 완수함으로써만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창세기 2장 17절). 따라서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는 데 있어서도, 그 사명을 담당한 중심인물이 그 책임분담을 수행함으로써만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도 구원섭리의 목적을 완성하시기 위하여는, 유대인들이 그를 절대로 믿고 따라야 할 것이었는데, 그들이 불신으로 돌아감으로써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뜻 성사’는 부득이 재림 때에로 미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뜻 성사’에 대하여 어느 정도로 예정하시는 것일까? 이미 위에서 논급한 바와 같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뜻’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그 뜻의 성사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실 95%의 책임분담에, 그를 중심인물이 담당해야 할 5%의 책임분담이 가담되어서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예정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 책임분담 5%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분담에 비하여 극히 작은 것임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 자신에 있어서는 100%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한 예를 들면, 아담 해와를 중심한 ‘뜻 성사’는,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으로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되어지도록 예정하셨던 것이다.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도, 노아가 방주를 제작하는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정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섭리도 타락인간이 그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것으로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비로소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요한복음 3정 16절). 그러나 인간들은 이 작은 책임분담마저 감당치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연장케 하였었다.
한편 또 야고보서 5장 15절에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마가복음 5장 34절에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하신 말씀이 있으며, 마태복음 7장 8절에서는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다. 이러한 성구들은 모두 인간자신의 책임분담 수해에 의하여서만,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정되었다는 사실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의 인간이 담당했던 책임분담은, 하나님이 그의 책임분담으로 담당하신 수고와 은사에 비하여 얼마나 작은 것인가를 알 수 있는 동시에, 다른 한편 섭리적 중심인물들이 그들의 책임분담을 감당치 못함으로써 복귀섭리를 연장시켜 왔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 가벼운 책임분담이 인간 자신에 있어서는 얼마나 힘에 겨울만큼 큰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담과 해와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선의 인간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가 인간조상이 되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타락인간도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어떠한 인물이 된다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을 어느 정도로 예정하시는 것인가? 어떤 인물을 중심한 하나님의 ‘뜻 성사’에 있어서는 그 자신이니 언제나 인간 책임분담을 해야만 된다는 필수적인 요건이 따라 다닌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인물을 어떠한 사명자로 예정하시는데 있어서도 그 예정을 위한 95%의 하나님의 책임분담에 대하여 5%의 인간 책임분담 수행이 합하여서, 그 인물을 중심한 뜻이 100% 완성됨으로써만 그러한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예정하신다. 그러므로 그 인물이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의 인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모세를 택하실 때에, 그가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선민을 가나안복지까지 인도할 수 있는 영도자가 되도록 예정하셨다(출애급기 3장 10절). 그러나 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될 때에 그 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도중에서 죽고 말았다(민수기 20장 7~12절, 20장 24절, 27장 14절).
한편 하나님이 가룟유다를 책하실 때에도, 그가 충성으로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함으로써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에 그 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도리어 반역자가 되고 말았다.
또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세우실 때에도,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모시어 맡겨진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영광의 선민이 될 수 있도록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줌으로써 이 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그 백성은 쇠퇴해 갔던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예정에 있어 복귀섭리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는 조건은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목적은 타락된 피조세계를 창조본연의 세계에로 완전히 복귀하시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기의 차이는 있으나, 타락인간은 누구나 다 빠짐없이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베드로후서 3장 9절).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가 그러했듯이, 그의 재창조역사인 구원섭리도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전체적인 것으로 넓혀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구원섭리를 위한 예정에 있어서도, 먼저 그 중심인물을 예정하시고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부르심을 받는 중심인물은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 그는 먼저 복귀섭리를 담당한 선민의 하나로서 태어나야 하며, 다음으로 같은 선민 중에서도 선의 공적이 많은 선조의 후손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똑같은 선의 공적이 많은 선조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그 개체가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천품을 타고나야만 하는 것이며, 또 같은 천품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이를 위한 후천적인 조건이 모두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후천적인 조건마저 똑같이 갖춘 인물들 중에서도 보다 하늘이 필요로 하는 때와 장소에 맞추어진 개체를 먼저 택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여러 가지의 문제점을 해명하였다. 그러나 다음으로 풀어야 할 문제는, 이 장의 앞부분에서 열거한 성구들과 같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성구를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로마서 8장 29절 내지 30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은 미리 아신 사람을 미리 정하사, 미리 정하신 이를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이를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를 또한 영화롭데 하신다고 한 말씀을 해명해 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어떤 사람이 복귀섭리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는 조건을(본장 제3절)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와같이 미리 알고 계시는 인물을 예정하시고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시는 하나님의 책임분담만으로는, 그가 의롭다 함을 얻어 영화를 누리는 데까지 이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부름 받는 입장에서 자기의 책임을 완수할 때 비로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의롭다 함을 얻은 후에야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화도 인간이 책임분담을 다함으로써만 누릴 수 있도록 예정되는 것이다. 다만 성구에는 인간 책임분담에 대한 말씀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에서만 이루어지는 것 같이 보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로마서 9장 15절 내지 16절에는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기록이 있다.
위에서 해명한 바와같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어떠한 인물이 가장 적합한가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미리 아시고 택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물이 택하시어 긍휼히 여기시거나 혹은 그를 불쌍히 보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기 때문에, 인간이 원함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이 아니요, 또 인간의 노력으로 달음박질을 해서 되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 성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권능과 은총을 강조하시기 위하여 주신 말씀인 것이다.
한편 로마서 9장 21절에는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슬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창조성을 닮게 하심으로써, 피조세계의 주인으로 세우시어, 가장 사랑하시기 위한 조건으로서 인간 책임분담을 세우셨다는 것은 이미 논술한 바 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조건을 스스로 범하여 타락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타락인간은 마치 쓰레기와 같이 버림을 받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설혹 하나님이 이러한 인간을 어떻게 취급한다 하더라도 결코 불평해서는 아니된다는 뜻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이 성구를 주신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 9장 10절 내지 13절에는, 하나님이 태중에서부터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시어, 장자 에서가 차자 야곱을 섬기리라고 한 말씀이 있다. 에서와 야곱은 복중에 있어서 아직 선악간에 아무런 행동의 결과도 나타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 것인가? 이것은 복귀섭리노정의 프로를 맞추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후편 제1장의 ‘아브라함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에서 설명하겠지만, 에서와 야곱을 쌍태로 세우셨던 것은, 그들을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자리에 갈라 세워 놓고, 아벨의 자리에 있는 야곱이 가인의 자리에 있는 에서를 굴복시킴으로써, 일찍이 아담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이루지 못하였던 장자권 복귀의 뜻을 탕감복귀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에서는 가인의 자리이므로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요, 야곱은 아벨의 자리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와같이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실제로 미워하시거나 사랑하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자신의 책임분담 수행여부에 따라서 좌우될 문제였다. 실상에서는 야곱에게 순종굴복하였기 때문에,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처지에서 야곱과 같은 사랑의 축복을 받는 자리로 옮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처지에 세워졌던 야곱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가 자기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였더라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책임분담과 인간의 책임분담이, 과연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모든 ‘뜻 성사’를 하나님께서 혼자 하시는 일로만 보아왔기 때문에, 칼빈(Calvin, Jean)과 같이 완고한 예정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나오게 되었고, 또 그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을 두고 그대로 인정되어 오기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