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창조목적을 완성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변할 수 없는 것으로서,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아벨이 하늘을 대하여 충성했던 그 심정의 터전 위에서, 그의 대신으로 셋을 세우셨다(창세기 4장 25절). 그리하여 그 후손에서 노아의 가정을 택하시사, 아담가정의 대신으로 세우시어 새로운 복귀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창세기 6장 13절에 모든 혈육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홍수심판을 하신 것을 보면, 그 때도 말세였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홍수심판 후 노아가정을 터로하여 메시아를 보내심으로써, 창조목적을 완성하려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아가정도 먼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우고, 다음으로 그 기대 위에서 실체기대를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아담가정이 복귀하지 못하였던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Ⅰ. 믿음의 기대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은 노아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으로 이루시려다 못 이루신 뜻을 대신 이루시기 위하여 아담으로부터 1600년을 지나 10대만에 노아를 부르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찍이 아담에게 축복하셨던 것(창세기 1장 28절)과 마찬가지로 노아에 대해서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하셨던 것이다(창세기 9장 7절). 이러한 의미에서 노아는 제2 인간조상이 된다.
노아는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 때에 부름을 받아(창세기 6장 11절), 120년간이나 갖은 조롱과 비소를 받아가며, 하나님의 명령에만 절대 순종하여, 평지도 아닌 산 꼭대기에 방주를 지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이것을 조건 삼아 노아가정을 중심하고 홍수심판을 감행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아는 제1 믿음의 조상인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는 노아가 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아래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같이, 그의 아들 함의 범죄로 인하여 노아의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사명은 아브라함에게로 옮겨졌던 것이다.
아담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설명한 바와같은 이유로 말미암아 자기가 직접 헌제를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이미 아벨이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하늘을 대하여 충성했던 그 심정의 터 위에서 부름을 받았고, 그는 또 혈통적으로 보더라도 아벨 대신 택함을 받은 셋(창세기 4장 25절)의 후손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그의 사람됨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이었기 때문에(창세기 6장 9절), 그는 방주를 지어 그것으로써 직접 하나님에게 상징헌제를 드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노아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들은 방주였다. 그러면 그 방주의 의의는 무엇이었던가? 노아가 아담대신 제2 인간조상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내주었던 천주를 탕감복귀하기 위한 조건을 세워야 한다. 따라서 신천주를 상징하는 어떠한 조건물을 제물로서 하나님 앞에 뜻 맞게 바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건물로 세웠던 것이 바로 방주였다.
방주는 3층으로 지었는데, 그 이유는 3단계의 성장기간들 통해서 창조된 천주를 상징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방주에 들어간 노아의 식구가 여덟이었던 것은, 노아가 아담 대신의 입장이었으므로, 일찍이 사탄에게 내주었던 아담가정의 여덟 식구를 탕감복귀하기 위함이었다. 방주가 천주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안에 주인으로 들어간 노아는 하나님을 상징하였고, 그의 식구들은 전 인류를 상징하였으며, 그 안에 들어간 동물들은 만물세계 전체를 상징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방주가 완성된 후에 하나님께서 40일간의 홍수심판을 하셨는데, 이 심판의 목적은 무엇이었던가? 창조원리에 의하면, 인간은 한 주인을 대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음란에 빠져서 이미 사탄을 대하고 있는 인류를 하나님이 또 하나의 주인의 입장에서 대하시어 비원리적인 섭리를 하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대하시어 섭리하실 수 있는 대상을 세우시기 위하여 사탄의 상대가 되어 있는 전 인류를 멸하시는 홍수심판의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심판기간을 40일로 정하신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후편 제3장 제2절 Ⅳ에서 논술하는 바, 10수는 귀일수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담 이후 10대 만에 노아를 찾아 세우셨던 목적은, 아담을 중심하고 이루지 못하였던 뜻을 노아를 중심하고 탕감복귀하여, 하나님에게로 다시 귀일시키기 위한 10수 복귀의 탕감기간을 세우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4위기대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4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으로써 각 대를 세우시는 섭리를, 노아에게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서 계속하여 오셨던 것이다. 따라서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기간은 40수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기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인간들의 음란으로 말미암아, 이 40수 탕감기간이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 방주를 중심하고 4위기대를 완성하는 섭리를 다시 하시기 위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한 이 40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으로 40일 심판기간을 세워 가지고,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되어 40수는 그 후의 탕감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사탄 분립수로 필요하게 되었다. 그 예를 들면 노아심판 40일을 비롯하여,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의 400년, 이스라엘 민족의 애급고역 400년, 모세의 두 차례에 걸친 금식기도 40일, 가나안 정탐기간 40일,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표류 40년,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왕의 재위기간 각 40년, 엘리야 금식 40일, 니느웨멸망에 관한 요나의 예언 40일, 예수님의 금식기도 40일과 부활기간 40일 등은 모두 사탄을 분립하는 탕감기간이었던 것이다.
한편 성경을 보면 그 심판이 끝날 때에, 노아가 방주에서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섭리를 어떻게 미리 보여주셨던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아모스 3장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 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방주를 하나님이 뜻 앞에 합당한 것으로 세움으로써, 천주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심판 40일기간은, 천지창조의 이상이 실현될 때까지의 혼돈기간(창세기 1장 2절)에 해당되는 기간이었다. 따라서 40일이 끝날 때에 방주를 중심하고 나타내 보이셨던 행사는,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완료한 이후의 전 역사노정을 상징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까마귀를 방주에서 내보내어, 물이 마를 때까지 왕래하게 하신 것은(창세기 8장 6~7절) 무엇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던가? 이것은 마치 인간창조 직후에 천사장이 해와의 사랑을 노렸었고, 도 가인과 아벨이 헌제를 할 때에도 사탄이 그들에게 침범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과 같이(창세기 4장 7절), 홍수심판이 끝날 무렵에도 사탄은 노아가정에 무슨 침범할 조건이 없는가 하고 엿보고 있었다는 것을, 까마귀가 어디에 앉을 곳이 없는가 하고 물 위를 찾아 헤매는 모양으로써 표시하신 것이었다.
다음으로 노아가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세 번 내보낸 것은 무엇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었던가?
성서에는 물이 준 것을 알아보기 위하여 비둘기를 내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목적이었다면 비둘기를 내보내지 않고 창문으로 직접 내다보아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설혹 그 문들이 모두 봉해져 있었다 하더라도 비둘기가 나갈 수 있는 구멍으로 내다 보아서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둘기를 내보냈던 목적은 물이 준 것을 알려고 했던 것보다 더욱 중요한 데 있었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 숨겨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겠다.
하나님이 노아를 통하여 홍수심판이 있을것을 선포하신지 7일 후에(창세기 7장 10절) 홍수가 시작되어, 40일 심판기간이 지난 후에 첫번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런데 이 비둘기는 물 위를 왕래하다가 발 붙일 곳이 없어서 다시 방주로 돌아가니, 노아가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창세기 8장 9절).
이 첫번 비둘기는 첫 아담을 상징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창세전부터 하나님 안에 있었던 그의 창조이상이, 아담이라는 완성실체로 실현되기를 우너하시어 그를 지상에 창조하셨던 것인데, 그가 타락되었기 때문에 그를 중심하고는 지상에 그 창조이사을 실현할 수 없게 되어, 하나님은 할 수 없이 그의 뜻 성사를 후일로 미루시고 그 이상을 일시 지상으로부터 거두어 들이셨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다음에 7일을 지나 노아는 다시 그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역시 물이 다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지상에 내려앉지를 못하고, 다음에는 앉을 수 있다는 표시로서 다만 감람나무 잎사귀를 입에 물고, 다시 방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창세기 8장 10~11절).
둘째 번으로 내보낸 이 비둘기는 창조이상의 ‘완성실체’로서 다시 오실 제2 아담된 예수님을 상징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이 복귀섭리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실 것이지만, 만일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는 지상에 머무실 수가 없게 되어 그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실 것이기 때문에, 부득이 그는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게될 것을 예시하신 것이었다.
물론 이 예시는, 만일 그 때에 땅에 물이 말라서 비둘기가 내려 앉아 먹을 것을 찾을 수 있었더면 그 비둘기는 결코 방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인데, 물이 채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로 다시 돌아갔던 것과 같이, 장차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잘 믿고 모시면, 그는 결코 죽지 않고 지상천국을 이루실 것이지만, 만일 그들이 불신으로 흐르지 않고 지상천국을 이루실 것이지만, 만일 그들이 불신으로 흐르게 되면, 예수님은 부득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재림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런 후 또다시 7일이 지나서 노아는 세번째로 비둘기를 내 보냈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물이 말랐었기 때문에, 다시는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창세기 8장 12절).
이 세째 번의 비둘기는 제3 아담으로 오실 재림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반드시 지상에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실현할 수 있게되어 다시는 그 이상이 지상에서 거두어지는 일이 없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제3차의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노아는 비로소 방주에서 땅으로 내려와 신천지를 맞이하였다. 이것은 제3 아담으로 인하여 창조이상이 지상에서 이루어질때, 비로소 요한계시록 21장 1절 이하의 말씀대로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될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이 비둘기를 세 번 내보낸 실례로써, 예정론에서 밝혀진 바와같이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그 섭리의 대상인 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면, 반드시 연장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아담의 불신으로 인하여 그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후아담으로 오셔야 할 것과 만일 유대인들도 불신으로 돌아가서 그들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부득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어 제3 아담으로 재림하셔야 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기록되어있는 7일이라고 하는 기간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7일이라는 기간이 있었던 것과 같이, 그것을 다시 찾아 세우는 데에도 섭리적인 어떠한 기간이 지난 후가 아니면 아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노아가정은 심판 40일로써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인 방주를 뜻맞게 찾아 세워 그 기대를 탕감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Ⅱ. 실체기대
노아는 방주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제물로 바쳐 ‘상징헌제’에 성공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였다. 이로써 노아는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동시에,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웠던 것이다. 다음엔 이 기대 위에서 노아의 아들 셈과 함이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입장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서 ‘실체헌제’에 성공하면 ‘실체기대’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노아가 ‘상징헌제’에 성공한 후에, 이 가정의 ‘실체헌제’가 뜻맞는 것으로 바쳐지기 위하여서는, 먼저 ‘실체헌제’의 중심이 되어야 할 차자 함이, 아담가정의 ‘실체헌제’의 중심이었던 차자 아벨의 입장을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었다. 아담때에는 아벨 자신이 아담의 대신으로 ‘상징헌제’를 하였기 때문에, 아벨이 그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는 동시에 ‘상징헌제’의 중심으로도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 때는 함이 아니고 노아 자신이 ‘상징헌제’를 하였기 대문에, 함이 ‘상징헌제’에 성공한 아벨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는, ‘상징헌제’에 성공한 노아와 심정으로 일체불가분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함으로 하여금 노아와 심정으로 일체적인 입장에 서게 하시기 위하여 어떠한 섭리를 하셨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창세기 9장 20절 내지 26절에 씌어 있는 기록을 보면, 함은 그의 부친 노아가 장막 안에서 알몸으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부끄럽게 여겼을 뿐 아니라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그 형제 셈과 야벳을 선동하였다. 이 때에 그들도 함의 선동에 뇌동되어 그의 부친의 알몸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이키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그 부친의 몸에 옷을 덮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죄가 되어 노아는 함을 저주하여 이르기를 그 형제의 종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이러한 섭리를 하셨으며, 또 나체를 부끄러워한 것이 어찌하여 죄가 되었는가?
이러한 내용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어떻게 되면 죄가 되는가 하는 문제부터 알아보기로 하자.사탄도 어떤 대상을 세워 그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주고 받는 관계를 맺지 않으면 그 존재 및 활동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든지 그에게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어 사탄의 상대가 됨으로써 사탄이 활동할 수 있게 될 때 거기에 죄가 성립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어찌하여 노아의 알몸으로써 함을 시험하셨던가 하는 것이다. 방주는 천주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판 40일로써 방주를 뜻 가운데 세운 직후에 되어진 모든 사실들을 상장한 것이기 때문에,심판 40일로써 방준를 뜻 가운데 세운 직후에 되어지는 모든 사실들을 상징한 것이었다 함은 이미 논술한 바와같다. 그러므로 40일심판이 끝난 직후의 노아의 입장은 천지창조 후의 아담의 입장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창조된 아담과 해와가 서로 얼마나 가깝고 허물할 것이 없는 사이였으며, 또한 얼마나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없었던가하는 것은, 창세기 2장 25절에 그들이 서로 알몸으로 있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한 후에 스스로 하체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나무잎으로 가렸었고, 또 하나님이 보실 것을 두려워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었다(창세기 3장 7절). 그러므로 그드이 하체를 부끄러워했던 행위는, 하체로 범죄하여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다는 정념의 표시요, 하체를 가리고 숨었었던 행동은,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범죄의식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40일심판으로 사탄을 분립한 입장에 있었던 노아는 천지창조 직후의 아담의 입장에 섰어야 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알몸으로 있어도 그 가족들이 그것을 보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또 숨으려 하지도 않는 모습을 바라보시는 것으로써, 일찍이 죄를 짓기전 어디도 가린 데 없이 들어낸 나체 그대로의 인간을 보시면서 기뻐하셨던 그 심정을 탕감복귀하려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큰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노아로 하여금 나체로 누워 있게 하셨었다. 따라서 함도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과 같은 심정으로 아무 부끄러움 없이 노아를 대했어야, 노아와 일체불가분의 뜻 가운데서 죄 짓기 전 부끄러움을 몰랐던 아담가정의 입장으로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아들들은 이와 반대로 그 부친의 나체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 이를 가렸으므로, 이로써 그들은 타락 후의 아담가정과 같이,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은 부끄러운 몸들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미 까마귀로써 보여주신 것과 같이, 노아가정에 침범할 수 있는 무슨 조건이 없는가 하고 엿보고 있었던 사탄은 자기의 혈연적인 후손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나선 노아의 아들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가정에 다시 침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함이 그 부친의 알몸을 부끄러워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그 행동은 범죄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함은 ‘실체헌제’를 하기 위한 아벨의 입장을 탕감복귀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실체기대를 이룰 수 없었으므로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도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 나체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죄가 되는가? 노아는 아담의 대신으로서 아담으로 인하여 사탄이 침범한 모든 조건들을 없애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가정은 나체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가리지도 않는다는 감성과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써,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기 전 아담가정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체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가리지도 않는 것으로 세워야 할 탕감조건은, 아담가정 대신으로 세워졌던 노아가정만이 세워야 할 조건이었던 것이다.
Ⅲ. 노아가정이 보여준 교훈
노아가 120년간이나 걸려서 산꼭대기에다 배를 지었던 것은 누구나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극심한 비난과 조소를 받은 그 일로 말미암아서 노아가정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함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과거의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함은 설혹 노아가 알몸으로 누어 있는 것이 못마땅하게 생각되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을 좋게만 볼 수 있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함은 자기를 중심하고 하늘 앞에 선 노아를 비판하고 또 그것을 행동으로 표시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담으로부터 1600년이나 지나 40일 홍수심판을 행사하심으로써 찾아 세우셨던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천국가는 길은 겸허와 순종과 인내를 요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또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분담 수행여부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셨다. 노아가정은 하나님이 1600년이나 걸려 찾아오셨고, 또 노아가 방주를 짓기까지 120년이나 이끌어 오셨으며, 뿐만 아니라 40일의 홍수로써 전 인류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세우신 가정이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함의 작은 실수로 말미암아서 사탄이 침범하게 되었을때, 하나님은 복귀섭리의 대상이었던 그 가정 전부를 아낌없이 쓸어버리시어,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이 어떠한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노아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려고 오랜 기간을 두고 애써 찾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정이 일단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를 아낌 없이 버리시고 그 대신 아브라함을 택하셨던 사실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